Dispensational Truth
VII
The Dispensational Work of the Lord Jesus Christ
7.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적 사역
성경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에 관한 공부를 그분의 "육신의 날들"로 제한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께서는
"영원하신 그리스도"
이심을 잊어서는 안된다.
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을 잘 알지 못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한 부분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구속사역은 그리스도의 일들 중 한 부분이며 우주가 창조될 때 이미 시작되었고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동안 줄곧 계속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위대한 생애와 사역"의 범위는 "영원"이며, 그 중심은 "갈보리"이다.
예수님의 혈통을 추적하면서 마태는 아브라함까지 거슬러 올라갔고(마1:1-17), 누가는 아담까지(눅3:23-38), 그리고 요한은 하나님까지(요1:1-2) 거슬러 올라간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시작과 끝이며, 처음과 마지막이라"(계22:13)고 하셨고, 또 "나는 '알파(ԡ)'와 '오메가(ԟ)'요, '시작'과 '끝'이라. 주, 곧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앞으로 오실 전능하신 분이 말하노라."(계1:8,11)고 하셨다. 즉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시 하신 것이다. "나와 내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10:30), 요한도 요한복음1:14에서 말하기를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므로 우리가 (변화산에서의)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으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또한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시기 전 다락방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제 아버지시여, 세상이 있기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누리던 그 영광으로 친히 나를 영화롭게 하여 주옵소서."(요17:5)라고 기도하셨다. 이 말씀들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있기 전에 계신 영원하신 그리스도이심을 알 수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하신 생애와 사역을 공부함에 있어 편의상 세 시대, 즉 그분의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누어 보자. "그리스도의 위대하신 생애와 사역"에 관한 도표를 보라.
I. 그리스도의 과거의 생애와 사역
Christ’ s Past Life And Work
그리스도의 "직무"는 "세 가지 면"인데 "선지자", "제사장", 그리고 "왕"이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를 동시에 수행하신 것이 아니라, 차례로 수행하고 계신다. 그분의 "선지자로써의 사역"은 하늘과 땅이 창조된 이후부터 시작하여 하늘로 오르실 때까지이다. "대제사장으로써의 사역"은 승천할 때부터 교회가 들림을 받기 전까지이다. 그리고 "왕으로써의 사역"은 대환란의 마지막에 지상으로 재림하셔서 왕국을 아버지께 드림으로써 "하나님께서 만물 안에서 모든 것(all in all)이 되시려 하심이라"(고전15:28)는 말씀이 이루어질 때까지이다. 그분의 과거의 생애와 사역은 다시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창1:1)라는 장엄한 말씀으로 시작된다. 유한한 인간은 하나님만이 홀로 계셨던 시기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처음에는 성부만 계셨고, 그리고 나서 성령과 성자가 성부로부터 생겨 나와 삼위일체를 이루었다는 주장은 틀린 주장이다. 만약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는 "아버지의 독생자(Only Begotten of the Father)"(요1:14)라는 표현이 그리스도의 영원한 근본(origin)을 뜻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께서는 성부와 공존하지 않았다는 것이 되지만, 만약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의 시작, 즉 마리아에게서의 탄생을 뜻하는 것이라면 그분은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아버지께로부터 태어났다는 점에서 "아버지의 독생자"이다(눅1:30-35). 그러나 또 다른 성경 구절들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그리스도에 관하여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안에서 우리가 그의 보혈을 통하여 구속, 곧 죄들의 용서함을 받았느니라. 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첫 태생이시니}(골1:14-15)
이 구절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예수님은 단지 한 "피조물"로써 태초에는 하나님이 아니었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윗 구절에서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 즉 만물을 "창조하신 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분의 인간으로 태어나셔 예수님이 되심으로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육신으로 나타나셨고"(딤전3:16). 따라서 그분은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고후5:17) 가운데서 "첫 태생(Firstborn)"이 되었으며 "둘째 사람", 즉 "마지막 아담(그리스도)"으로써 새로운 피조물의 머리가 되셨다(고전15:45). 어째든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은, "성삼위"(Divine Three)께서는 모든 피조물이 존재하기 이전에 이미 동등한 위치에서 함께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창조의 사역"에 있어서 예수님은 "말씀"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느니라. 그 말씀이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느니라. 만물은 그에 의하여 지은 바 되었으며, 이미 지음 받은 것 가운데 그가 없이 지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더라}(요1:1-3). 이 말씀을 바울은 골로새서1:16-17에서 확증하고 있다.
{이는 만물이 그에 의하여 창조되되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과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보좌들이나 주권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그에 의하여 또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이라. 그는 만물 이전에 계시고 또 만물은 그로 말미암아 존속하느니라}.
만물이 그리스도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여기에는 성부와 성령의 도움이 있었다. 이것은 창세기1:26에 분명하게 볼 수 있다. "하나님(Divine Three)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의 형상대로 우리의 모습을 따라 사람을 만들자". 아버지의 일은 물질을 창조하는 것이며, 아들의 일은 그 물질을 여러 모양의 형태로 만들며, 또 성령의 일은 모든 생명체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었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는데 있어서 그리스도의 일은 이사야40:12절에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다.
{누가 손바닥으로 물들을 헤아렸으며 뼘으로 하늘을 재었으며 땅의 티끌을 되에 담아 보았으며 큰 저울로 산들을 달아 보았으며 작은 저울로 작은 산들을 달아 보았겠느냐?}
성경에서 가장 오래된 욥기에도 그리스도의 창조 사역을 화려하게 설명하고 있다. 욥기38장과 39장을 보라.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표적에서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창조의 능력을 엿볼 수 있다(요2:1-11). 자연적인 포도나무에서 의하지 않고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기적을 행하셨는데, 이것은 그분의 창조의 영광을 증명한다.
사람을 창조하신 이후 그리스도의 "창조 사역"은 끝이 났다. 왜냐면 창세기2:2에 "일곱째 날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하시던 일을 끝내시고, 자신의 하시던 자신의 모든 일로부터 일곱째 날에 쉬시니라." 그 때부터 그분의 일이란 "관리" 및 "구속"이었다. 창세기2:4절에서 하나님이 "주 하나님"으로 바뀐 것을 보게 된다. 왜 그러한가? "창조자(Creator)"로서의 하나님을 뜻하는 히브리어는 엘로힘(Elohim)이며, "계시자(Revealer)"로서의 하나님을 뜻하는 히브리어는 여호와(Jehovah)인데 이것을 번역하면 "주 (主: Lord)"이다.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구약 성경에서 약 6,000번 이상 언급되고 있다.
창세기의 첫 부분에는 네 가지로 하나님의 이름이 나타나는데 제각기 하나님의 독특한 속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엘로힘;Elohim) "주(여호와;Jehovah)" "전능하신 하나님(El Shaddai),그리고 지극히 높으신 분(엘 엘욘;El Elyon, 창14:22) 이다. 이 이름들이 시편91:1-2절에 모두 사용되고 있다.
{지극히 높으신 이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이의 그늘 아래 살리로다. 내가 주에 관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시며 나의 요새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신뢰하리라." 하리로다}.
여호와는 사람의 모든 필요를 만족시키는 분으로써 자신을 계시하시기 위한 심오한 일곱 가지의 이름이 있다.
1. 여호와 이레 (JEHOVAH-JIREH) "주님께서 공급해 주실 것이라"(창2:14) - 예비하시는 주님.
2. 여호와 라파 (JEHOVAH-RAPHA) "치료하는 주님" (출15:26)
3. 여호와 닛시 (JEHOVAH-NISSI) "주님은 우리의 깃발"(출17:15)
4. 여호와 샬롬 (JEHOVAH-SHALOM) "주님은 우리의 평화"(판6:24)
5. 여호와 라하 (JEHOVAH-RA-AH-) "주님은 나의 목자"(시23:1)
6. 여호와 지드케누 (JEHOVAH-TSIDKENU) "주님은 우리의 의"(렘23:6)
7. 여호와 삼마 (JEHOVAH-SHAMMAH) "주님께서 거기 계시다"(겔48:35)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여러 가지 이름의 의미를 알아야 그 이름의 중요성을 이해할 수 있다. "창조자"로서의 그리스도라는 단어는 "엘로힘(ELOHIM)"이며, "계시자와 구속자"로써는 여호와(주; LORD)이다. 창조자(엘로힘)로서 그리스도는 인간과의 언약 관계에 있어서는 "계시자와 구속자"(여호와)이다. 그분은 단지 사랑의 하나님으로 뿐만 아니라 악을 징벌하시는 의와 공의의 하나님으로도 나타나신다. 함께 사용하든 따로 사용하든 제각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구약 시대에 그리스도가 "창조자" 혹은 "보존자(Preserver)", 즉 "계시자" 또는 "구속자"를 뜻하느냐에 따라 각각 "엘로힘", "여호와" 또는 "여호와 엘로힘"(주 하나님)으로 불렸다. 이것을 염두해 두고 천지 창조부터 육신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실 때까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더듬어 보자. 에덴의 동편에 동산을 만드시고 그 곳에 아담과 이브를 살게 하시고 그들에게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지시하신 분은 "주 하나님", 즉 그리스도이셨다. 날이 서늘할 때에 아담과 이브에게 나타나 불순종을 책망하시고 여자의 씨가 사탄의 머리를 부술 것이라고 그들에게 약속하신 분도 그리스도이셨다. 또한 그들을 동산에서 추방하신 분도 그리스도이셨다(창3:8-23). 카인에게 그의 동생 아벨을 죽인 것을 책망하신 분도 그리스도이셨다(창4:9). 노아의 홍수를 경고하신 분도 그리스도셨으며, 그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하시고 방주의 문을 닫으신 분도 그리스도이셨다(창6:1-22). 갈대아 우르에게 아브라함을 불러내어 그에게 카나안으로 가도록 지시하신 분도 그리스도이셨다(창12:1-3). 아브라함이 거하는 장막 입구에서 두 천사와 함께 나타나신 분도 그리스도이며, 이삭의 출생을 예언하신 분도 그리스도이셨다. 평지 도시들인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것을 예언하신 분도 그리스도이셨다(창32:24-30). 호렙산에서 모세에게 가시덤불 가운데 나온 불꽃 속에서 나타나신 분도 그리스도이셨다. 모세가 "주의 천사"에게 그의 이름을 물었을 때 그분은 "나는 곧 나니라(I AM THAT I AM)"고 대답하시고 덧붙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이같이 말할지니 "나이신 분(I AM)"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고 말씀하셨다. 가시덤불 불꽃 속에서 "나이신 분(I AM)"이라고 말씀하신 분이 바로 "나는(I AM)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신약에서의 그리스도이시다. 이집트인들에게 재앙을 내리셔 자신의 예표인 유월절 어린양을 죽게 하신 분도 그리스도이셨다(출12;1-30).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을 위하여 홍해를 가르신 분도 그리스도이셨다.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로 이스라엘 백성을 먹여 살리신 분도 그리스도였고(출16:1-15),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주신 분도 그리스도이셨다(출20:1-26). 솔로몬 성전과 성막 가운데 영광 중에 나타나신 분도 그리스도셨으며,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광야 생활의 마지막까지 이스라엘 자손들을 인도하신 분도 그리스도이셨다(출13:21-22).
여호수아가 만난 "주의 군대 대장"도 그리스도였고(수5:13-15), 요단강을 갈라 이스라엘 백성을 건너게 한 후 여리고를 포위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도와 땅을 정복하게 해 주신 분도 그리스도셨으며, 여호수아의 대를 이어 재판관들을 세우고 그들을 명하여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게 하신 분도 그리스도이셨다. 그리스도는 기드온, 삼손 그리고 사무엘과 함께 계셨다. 사울은 초대 왕으로 택하신 분도 그리스도셨고(삼상9:15-17), 사울의 불순종으로 인해 어쩔수 없이 다윗을 왕으로 택하시기 직전까지 사울을 축복하신 분도 그리스도이셨다.(삼하16:1-13) 선지자들을 택하시고 그들에게 일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신 분도 물론 그리스도이셨다. 웃시야왕이 죽은 그해에 성전에서 이사야는 그리스도의 환상을 보았고 그 분의 영광 앞에서 이사야는 자신이 부정한 입술을 가진자임을 알았다(사6:1-8). 70년간의 포로 생활을 종결시켜 달라는 다니엘의 기도를 들으시고 가브리엘 천사를 보내어 "칠십주"에 관한 환상을 통해 십자가에 못박히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정확한 날짜를 계시하신 분도 그리스도이셨다(단9:1-27).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을 살펴보면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이후로 육신으로 이땅에 오실 때까지 사람들의 역사를 살피시고 특히 선택된 민족인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는 일에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활동적임을 알 수 있다.
모세가 주님께 "주의 영광"을 보여줄 것을 간청했을 때 주께서는 "네가 내 얼굴을 볼 수 없으니 이는 나를 보고서 살 자가 아무도 없음이니라"(출33:20)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11절에서 "주께서는 사람이 자기 친구와 말하는 것같이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두 말씀을 모순되지 않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주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직접 나타나실 때는 아브라함 때와 같이 변장하여 나타나시거나 그렇지 않으면 몇몇 사람이 추정하는 바와 같이 창조이전에 인간에게 직접 나타나실 필요를 예상하고 한 "형태"로 나타나실 준비를 이미 하고 있었으리라는 가정이다. 그 "형태"란 인간의 형태셨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인간을 창조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상대로 우리의 모습을 따라 사람을 만들자"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모습"이 반드시 "혈과 육"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구약 시대에는 이러한 만남이 아주 가끔 있었는데 이는 그리스도께서 육신의 몸으로 나타나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속 사역이 필요하게 되자 그리스도께서는 "오히려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를 입으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느니라"(빌2:5-8)라는 말씀처럼 사람이 되셨던 것이다.
II. 그리스도의 현재의 생애 사역
CHRIST'S PRESENT LIFE AND WORK
그리스도의 현재의 사역은 대제사장이다. 그분은 지금
“성소의 휘장” 안에 거하시고 계신다.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 번 즉 속죄일에 휘장을 거쳐 “지성소(Most Holy Place)”로 들어가 백성들의 죄들을 위하여 짐승의 피를 드린 것과 같이 예수님이 승천하여 구름 휘장을 지나 우리의 육안으로 볼 수 없는 하늘 성막의 “지성소”로 들어가셨다(행1:9; 히4:14). “이는 그리스도께서 실물의 모형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 자체에 들어가셔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임재하심 가운데 지금 나타나 계시기 때문이라.”(히9:24) 지상이 아닌 하늘은 그리스도께서 제사장으로 활동하시는 영역이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에 제사장으로 나타난 적이 없었다. 주님은 그곳에 가르치러 간적은 있으나 번제를 드리거나 분향을 하기 위해 간 적은 없었다.
성막에서 드리는 예물이나 제사, 성전의식이 드리는 자의 양심은 온전하게 할 수도 없었다. “율법에는 다가올 선한 것들의 그림자는 있으나 그 자체가 그것들의 형상이 아니므로 그들이 해마다 계속해서 바치는 희생제물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결코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히10:1). 절기 가운데 “속죄일”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 날에 대제사장은 혼자 지성소에 들어간다. 영화롭고 아름다운 의복을 벗고 목욕을 한후 세마포롤 만든 옷을 입고 머리에는 세마포로 만든 관을 쓴다. 그 다음 그는 향단 앞에 있는 향로에 타는 숯을 가득 채워 넣고 그 위에 향을 피운다. 그러면 그 연기가 언약궤 위에 있는 “자비석”을 뒤덥어 육안으로 보이지 않게 하므로 대제사장은 죽음을 면한다. 그는 지성소에서 물러나와 안뜰로 가서 자기 자신과 가족을 위한 속죄제물로 수송아지를 잡고 그 피를 가지고 다시 성막으로 들어가 휘장을 지나 “자비석”을 향하여 그의 손가락으로 피를 일곱번 뿌리어 자신과 가족의 죄를 용서함 받는다. 그 다음 다시 뜰로 돌아와 속죄제물로 드리기 위하여 제비뽑힌 염소를 죽이고 그 피를 가지고 세 번째로 지성소에 들어가 수송아지의 피를 뿌렸던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피를 뿌려 회중을 위한 속죄제를 드린다. 그 다음 안뜰로 돌아와 놋제단 앞으로 가서 염소와 황소의 피를 섞어 우선 제단 귀퉁이 뿔들에 바른 후 손가락으로 일곱번 뿌림으로써 회중의 죄를 속한다.
그 다음 그는 “속죄 염소”라고 부르는 염소를 취하여 양손으로 그 머리 위에 얹고 이스라엘 백성의 죄들을 고백함으로 염소의 머리에 그들의 죄들을 전가, 즉 이전 한 후 사람이 살지 않는 광야에 그 염소를 내버려 둔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 염소는 백성들의 죄들을 지고 간 셈이 되었던 것이다.
그 다음 대제사장은 장막의 성소로 돌아와서 세마포 의복을 벗고 몸을 씻은 후 다시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의복을 입고 안뜰로 간다. 그가 이렇게 나타날 때 까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속죄 제물을 나무 오래 머물러 있게 되면 백성들은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대제사장이 죽임을 당한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들은 대제사장의 소매 끝에 달려있는 방울 소리가 들릴 때에 속죄 제물이 받아들여졌음을 알고 안도의 숨을 쉬게 된다. 대제사장이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옷 차림으로 밖으로 나와 놋 제단 앞으로 가서 하나님을 향한 봉헌의 표시로써 번제를 드렸는데 하나는 그 자신을 위해, 또 하나는 백성을 위해 드렸다.
“속죄일”에 행하는 대제사장의 일을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 적용해 보자. 예수님은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종의 형상을 지니시고 이 세상에 오셨다(빌2:5-8). 그는 “영화롭고 아름다운 의복”을 벗어 버리고 인간의 “세마포”를 입고 섬기셨다. 그분은 지성소에서 향을 피우거나, 자신을 위한 속죄제물로 소를 드리지는 않으셨다. 그 이유는 죄인이 아니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분은 온 세상 사람들을 위한 속죄 제물로 드려져야만 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역은 하나의 제물로 바쳐진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양면성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처음에 예수님은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죽으셨다. 그 다음은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구름의 휘장을 지나 “하늘의 장막”의 “지성소”에 들어가셨다. 세상 죄를 위하여 자신의 피를 드리셨다. 이러한 사실은 두 마리의 염소를 통하여 예표되어 있다. 첫 번째 것은 “속죄 제물”로 드려져 죽임을 당했고, 두 번째 것은 “속죄 염소”로써 사람들의 죄를 지고 광야로 보냈다(레16:8-10, 20-22). 그러므로 문둥병 환자가 정결케 되었을 때도 두 마리의 살아았는 새가 필요했다. 한 마리는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게 하고 또 한 마리는 살아있는 채로 놓아 주었다. 흐르는 물 위에서 잡은 새의 피를 찍어 문둥병에서 정결함을 받은 자에게 일곱 번 뿌린 후에 그 살아 있는 새 한 마리를 날려 보냈다(렘14:7).
대제사장은 일년에 한 번씩 속죄 제물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갔지만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자신의 피”로써 “하늘의 장막”인 “지성소”에 단 번에 들어가셨다. 그렇지 않았으면 그분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했을 것이다. “그리하면 세상의 기초가 놓인 이래 그가 여러 번 고난을 당했어야 할 것이지만 이제 그는 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구약시대의 끝)에 한 번 나타나셨느니라.”(히9:24-26).
대제사장으로 자신의 피를 가지고 휘장 안으로 들어가신 예수님은 아직까지도 대제사장의 의무를 수행하고 계시며, 이
“대속죄일”
동안 그 직무를 계속하실 것이다. 그 직무가 끝날 때 대제사장의 의복을 벗어버리고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왕복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천년 동안 왕국을 통치하실 것이다.
제사장은 장막이나 성전에 앉아 있을 수가 없다. 왜냐면 제물이 계속적으로 드려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한 번(once for all)” 속죄제를 드린 후에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앉아 계시며”(히12:2), 이 보좌를 “은혜의 보좌”라고 한다(히4:6). 우리는 사도행전7:55-56절에서 스테판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신 것을 보았다는 구절을 읽을 수 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스테판을 맞아들이려고 서셨거나, 그때까지는 앉아 계시지 않았던 것이다. 왜냐면 예수님은 승천하신 후부터 대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했다는 사실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행7:51).
유대 민족이 “삼위 하나님”을 계속적으로 배척한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사무엘 시대에 그들은 “아버지 하나님”을 거부했다(삼상8:6-7). 그리고 “아들 하나님”이 육신의 몸으로 세상에 오셨을 때 그들은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를 통치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눅19:14; 마21:37-39)라고 말했다. 그들은 또한 스테판을 통하여 말씀하신 성령을 거역했다(행7:51).
1. 중보자 MEDIATOR.
바울은 디모데에게 쓰기를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의 지식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시라}(딤전2:4-5).
그리스도는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모두의 중보자이다. 그분은 하나님의 인간의 “중보자”가 되기 위해서는 인간이 되셔야 했다. 사람은 어떤 두 사람의 중재자가 될 수는 있지만 짐승인 말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는 될 수가 없다. 말과 인간 양쪽의 성품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도 하나님과 인간 양쪽의 성품을 갖고 있는 “하나님인 사람(Divine Man)”이 되시기 이전에는 하나님과 인간의 중보자가 될 수 없었다. 그리고 하늘로 올라가실 때도 사람의 몸을 지니셨으며 지금도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하늘에 계신다(딤전2:5).
2. 변호인 ADVOCATE.
ꡔ나의 어린 자녀들아, 내가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로 죄를 짓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 그러나 만일 누가 죄를 지으면 우리에게 아버지와 함께 있는 한 변호인이 있으니, 곧 의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시라ꡕ(요일2:1).
이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의인의 변호자이심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요한 일서는 “나의 어린 자녀들아” 곧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사람들에게 보낸 서신이기 때문이다. 죄인에게는 변호인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구속주가 필요하다. 재판이 끝나고 재판관이 사형판결이 내려졌는데 변호인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변호인 아니라 사면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정죄를 받지 아니하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정죄를 받은 것이라”. 그리고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3:18,36) 죄인에게 필요한 것은 중보하여 주시는 예수님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십자가에 죽이신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1. 어떤 사람들은 속죄가 상거래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상거래에는 사는 사람과 파는 사람, 팔 물건과 가격이 있다. 만약 말 100필을 산다면 사는 사람은 말의 수가 정확한가 흠이 없는가를 확인하고자 한다. 이것을 속죄의 의미에서 보면 예수님은 일정한 사람들만 피로 값 주고 사셨으며 그들만 그분이 택한 것이 된다. 이런 견해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제한적 속죄설(Limited Atonement)”을 고집하고 있다.
2.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이 속죄를 받을 수 있기 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사람들은 한결같이 “보편적 구제설(Universallists)”을 주장한다.
3.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본질은 단지 선택된 몇 몇 사람만을 위한 것도 아니며 다만 모든 사람이 심판을 받게 되어 있다고 전제하고 누구든지 자기 죄를 깨닫고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용서하신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 이 마지막 견해만이 성경 말씀과 일치하는 정확한 견해이다. 성경은 “그러나 누구든지 그를 영접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3:16)고 했기 때문에 구원은 어떤 특별한 부류의 사람들에 제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고자 한다면 어떤 상태가 된 사람, 즉 예수님이 자기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을 지니고 회심한 사람을 구원하신다. 따라서 오직 그리스도인, 즉 구원받은 사람들만의 “변호인”이 되시는 것이다.
만일 예수님께서 우리의 변호인이시라면, 예수님은 무엇에 대한 우리의 변호자이신가? “죄”“에 대한 문제는 십자가에서 해결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변호인이 필요없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에 저지른 “죄들”에 대한 우리의 변호인이시다. ꡔ나의 어린 자녀들아, 내가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로 죄를 짓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 그러나 만일 누가 죄를 지으면 우리에게 아버지와 함께 있는 한 변호인이 있으니ꡕ(요일2:1) 우리의 변호인은 우리가 “죄”를 지을 경우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중보하신다. 그것이 그분의 일이므로 그 일을 위해서 계속해서 하나님 오른편에 계신 것이다. 만약 사람이 죄들을 범하여 고소당하면 우선 그의 잘못을 변호하고 재판 과정을 주시할 변호인 즉, 대변자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들은 죄들을 지었을 때 대변자를 필요로 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짓고 나면 그것이 구원받지 못한 증거라고 생각하여 낙담하거나 실망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인들도 죄를 지을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사도 요한은 “만일 우리가 우리에게 아무 죄도 없다고 말하면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이요, 진리가 우리 안에 있지 아니하나”(요일1:8)라고 기록한다.
지위와 상태
STANDING AND STATE.
즉 우리는 우리의 “지위(Standing)”와 “상태(State)”를 구분해야 한다.
우리의 지위는 하나님의 아들이다(요1:12-13; 3:;1-2). 우리는 현재 “아들”인 것이다.(요일3:2) 이 “아들 됨”은 우리를 “상속자”로 만든다(롬8:17). 그리고 이 “상속권”이 우리를 보호할 것이다(벧전1:5;요3:16;6:39). 어떤 사람들도 우리를 아버지의 손에서 뺏앗지 못한다(요10:27-29). 우리들은 육신의 구속함을 받을 때까지 “인치심”을 받았고(엡4:30),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골3:3).
그러나 우리의 “지위”는 안정되고 확실한 반면, 우리의 현재 “상태”는 불안정하다. 그 이유는 우리가 전에는 단 한기지 성품만을 갖고 있었는데 “거듭난” 이후 “두 가지 성품”을 소유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새 아담”즉 “새로운 영”을 받을 때 우리의 “옛 사람” 즉 “육신적인 성품”까지 잃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육”으로 난 것은 여전히 육이다. 오직 “성령”으로 난 것만이 영이기 때문이다(요3:6). 이것이 바로 로마서7:14-25절에서 바울이 실제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어느 성품이 우세한가에 따라서 죄들을 지을 수가 있고 죄들을 짓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 “영적인 성품”은 죄를 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요일3:9). 경험 정도에 따라 믿는 사람들은 다음에 제시하는 세 곳 중에 살고 있을 것이다.
(1) 세상을 상징하는 이집트에 있을 수 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들의 문설주에 “유월절 양”의 “피”를 발랐을 때 이집트에서 안전했다. 마찬가지로 믿는 사람들도 세상을 상징하고 있는 이집트에 여전히 살고 있더라도 그의 혼이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순간 안전하게 되며, 구원을 받았다.
(2) 육신을 상징하는 광야에 있을 수 있다. 그는 광야에서 이집트의 고기와 빵을 그리워하면서도 이집트로 돌아가지는 꺼리고 그렇다고 그리스도인으로써 행복한 삶을 누리는 것도 아니다.
(3) “믿음으로 안식함을 상징”하는 카나안에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의 혼은 원수인 카나안 족속, 햇족속과 소유권을 놓고 싸우고 있다(수3:10).
성경은 신자가 육신을 이겨나가는 세가지 길을 제시하고 있다.
(1) 단절함으로써(Amputation)(마18:8-9),
(2) 절제함으로써(Mortification)(롬8:13;골3:5-10),
(3) 인내로써(Limitation)(히12:1) 육신을 이겨간다.
지금까지 읽은 내용으로써 우리와 아버지와의 “교제(Fellowship)”는 끊어질 수 있으나 아버지와의 “관계(Relationship)”는 끊어질 수 없는 것이다(요일3:7). “죄인의 죄들”과 “믿는자들의 죄들”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들을 똑같이 증오하시며 어쩌면 밝은 빛 가운데서 죄들을 범하는 신자의 죄들을 더욱 미워하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차이점은 죄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죄들을 다루시는 방법에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한 아버지가 아들과 종에게 일거리를 주었다고 생각해 보자. 이들은 게으르고 무능하며 일을 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참고 그들에게 기회를 주셨으나 소용이 없다. 그의 아들과 종은 아무 쓸모가 없다. 아마 그의 아들이 종보다 더 한심스러웠을 런지도 모른다. 이제 아버지의 입장은 어떻게 겠는가? 그의 종을 해고하고 집에서 쫓아낼 것이다. 이제 그와 아버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러나 그 아버지가 그의 아들을 해고하겠는가? 그가 아들을 집에서 내쫏겠는가? 그가 아들에게 재산을 상속하지 않겠는가? 그럴 수 없다. 아버지는 아들을 꾸짖고 돈을 주지 않으며 종보다 더 심한 벌을 줄런지도 모른다. 그런 아버지는 그가 아들이기에 집에서 쫏아내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아들의 신분”은 아주 실제적인 것이다. 그러면 아들이라는 신분만 있으면 죄들을 범하고도 형벌로부터 안전한가? 나의 “아들의 신분”이 나를 죄로부터 안전하게 만들 수 있는가? 아니다! 단지 변호자를 가질 수 있는 특권을 가진 것 뿐이다. 인간은 어떨수 없이 죄들을 짓는다. 그렇지만 믿지 않는자로써 죄를 짓는 것보다는 아들로써 죄를 짓는 것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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