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륜/거짓을 구분함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무형11 2012. 2. 14. 04:07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교회를 다니는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의문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 이다.

 

왜냐면 구원을 받는 방법이 나온 성경은 대부분이 선택된 민족인 유대인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이라고 추정할 수 있는 조상은 노아의 후손인 셈족일 것이다.

하지만 이들조차 창세기 11장 바벨탑 사건 이후로 온 세상으로 흩어져 언급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아브람함을 선택하신 이후 신약 끝까지 주로 유대인들의 역사와 예언이 기록된다.

물론 다니엘이나 이사야처럼 세계사적인 역사와 예언이 기록되긴 하지만 그것도 유대인에 관련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째든 구약에는 우리 민족이 언급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우리민족은 예수님을 몰랐기 때문에 모두 지옥에 갔다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오실 것을 믿고 구원받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주장들은 대부분 그리 성경적이지 않으며 성경의 한두구절로 아무렇게나 적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문제는 대부분의 교단 교회 신도들은 불신자들에게 예수님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우리 조상들은 모두 지옥에 갔다고 믿거나 말한다는 점이다.

이것으로 불신자들이 하나님이나 성경에 대해 아주 강한 반감과 적대감을 지니게 된 것도 사실이다.

 

먼저 성경에서 육신의 심판과 혼의 심판을 반드시 구분해야 한다

즉 구원이란 단어에서 모든 구원이 같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구원에 대해 성경에거 찾아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지옥으로부터의 구원은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음에 대해 알게 될 것이다.

 

이 땅에서의 심판은 주로 육신의 죽음을 말한다.

따라서 구원은 주로 육신에 한정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사람들은 육신의 심판을 마치 혼의 심판과 동일시 여긴다.

 

[고린도전서 3:15] 만일 어떤 사람의 일한 것이 불타 버리면 그는 손해를 당하리라. 그러나 그 자신은 구원을 받게 되지만 불에 의해서 그렇게 되리라.

[고린도전서 5:5] 그러한 자를 사탄에게 넘겨 주어 그 육신은 멸망케 하여도 그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받게 하려 함이라.

 

간단히 몇 몇 구절을 살펴봐도 그리스도인에게도 수많은 심판이 있지만 육신의 멸망과 혼의 구원과 다름를 알 수 있다.

 

 

1. 에덴동산에서의 경륜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과 악을 알기전까지는 분명히 다루시는 방법은 하나뿐이 없었다...

그것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도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것이다.

이 죽음은 "지옥으로 던져지는 두번째 사망"이 아니다.

만일 이 죽음이 둘째 사망이라면 아담이 선악과를 먹는 즉시 불못에 던져졌을 것이다.

즉 아담은 죽음을 맞기는 했지만 지옥에 던져지진 않았다. 아담과 하와가 지옥으로부터의 구원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히 모른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었으므로 지옥에 갔다라는 교리나 주장은 성경적 근거 없는 아주 단순한 생각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죽음이 “둘째 사망” 아닌점은 즉시 지옥가지 않은 것과 그 죽음이 유전되기 때문이다.

즉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순간 즉시 죽었다. 그것은 둘째 사망에 던져 지거나 첫째 사망 즉 육체가 죽는 죽임이 아니였다. 그 죽음은 다른 죽음이였다.

 

[로마서 5:15] 그 범죄와는 다르지만, 그 값없는 선물도 그러하도다. 만일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다면, 더욱더 하나님의 은혜와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풍성하였느니라.[에베소서 2:1] 허물과 죄들로 죽었던 너희를 그가 살리셨으니

 (요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전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들은 영이요, 생명이라.』

 

이것을 영적 죽음이라고 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이 하나님과의 단절을 말한다.

선악과를 먹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교체는 끝났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

어째든 이 죽음이 첫째 사망(육체적 죽음) 과 둘째사망(불못)과는 다르다.

 

만일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상태에서 생명나무를 먹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생명나무를 금지하셨가? 

 

생명나무는 분명히 영생을 가져다 준다. 그렇다면 아담은 육체적으로 영원히 살수 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막으셨다.

만일 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었다면 아담은 아이러니 하게도...

 

"죽은 상태에서 영원히 산다."

 

이것을 왜 하나님께서는 막으셨을까?

그것은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안다.

예를 들면 고대의 무자비한 독재자들이 지금도 치리한다고 생각해 보면된다.

인간은 시간이 지날수록 악해지면 악해지지 선해지지 않는다.

죽은 영을 지니고 육체적으로 영원히 사는 것이 결코 축복이 아니다.

오히려 아담에게 생명나무를 금지시켜 육체적 죽음을 허락한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인 것이다.

아담이 지금까지 육체를 지니고 살았다면 어떠할까..

아마도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양의 죄들을 지으며 살고 있었을 것이다.

육신의 죽음은 하나님의 저주이면서도 한편으로 죄들을 단절시킬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이다.

 

[빌립보서 1:23]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어 있으니 내가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갖는 그것이 훨씬 좋으나

바울이 구원을 받은 뒤 이런 감정을 지닌 것은 당연하였다.

구원을 받은 뒤 육체를 지닌 체로 죄를 짓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임이 알았기 때문이다.

 

어째든 아담의 육체적 죽음으로 예수님의 부활이 가능하여 거듭날수 있는 것이다.

만약에 아담이 생명나무를 먹었더라면 예수님의 부활도 필요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는 영생이 아니다.

사람들이 과학을 발전시켜 생명을 영원히 연장시킨다고 그것이 구원은 아닌 것이다.

  

2. 타락이후에서 노아의 홍수 이전의 경륜

 

타락이후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와 그 후손들을 다루시는 방법은 주로 양심을 통하여 죄를 이기는 것이였다..

 

아담의 실패로 인하여 아담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수 있는 생명나무의 권리를 빼앗겼으며, 흙으로 돌아가는 육심의 죽임이 결정되었고 고통의 저주가 임하였다.

성경에 정확히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 아담과 그의 후손들의 죄를 처리하기 위해 몇가지 방법을 알려주신것이 거의 확실하다..

그 방법은 죄의 욕망을 다스리는 것이였다.

 

이것은 현재까지도 유효하다.

창4:4 아벨도 자기 양떼 가운데서 첫배 새끼들과 그 살진 것을 가져왔더니, 주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 카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셨더라. 그러므로 카인이 몹시 격노하고 안색이 변하더라.

7 네가 바르게 행하면 받아들여지지 않겠느냐? 네가 바르게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 앞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욕망이 네게 있으니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하시니라.

-많은 언약 신학자들은 이 구절을 가르키면 아벨은 예수님의 예표인 양의 새끼를 바쳤기 때문에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고 카인은 그렇지 않았다고 말한다.

우리는 문맥상 카인에게 경고한 “네가 바르게 행하면 ” “죄의 욕망이 네게 있으니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이구절이 양을 바치라는 구절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 구절은 창세기 다음구절과 연결된다.

 

창6:5 하나님께서 사람의 사악함이 세상에 창대해짐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구상이 계속해서 악할 뿐임을 보시고

6 주께서 땅 위에 사람을 지으셨음을 후회하셨으니, 그 일이 그의 마음을 비통케 하였더라.

창세기 6:3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영이 항상 사람과 다투지는 않으리니, 이는 그도 육체임이라. 그래도 그의 날들이 일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9 이것이 노아의 내력이라. 노아는 의인이요 그 당대에 완전한 사람이었으며 하나님과 동행하였더라.

 

즉 카인은 제사를 잘못드려서 하나님께 책망 받은 것이 아니라 행위가 악했기 때문에 책망받은 것이다.

노아가 의인이라 칭함을 받은 것은 양을 바쳤기 때문이 아니다. 그의 행위가 의로웠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율법을 하나님께서는 계시하지 않으셨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제사하는 어떤 법이 없다. 이 당시는 자신의 양심대로 의롭게 살면서 창조주께 경배하면 되는 것이였다.

 

3. 홍수 이후의 경륜

 

홍수 이전과 이후의 경륜을 나누는 이유는 “혼의 구원”에 관한 방법이 달라자기 때문이 아니라 “육신을 구원하는 방법”으로 나누는 것이다.

노아의 홍수를 “육체의 구원을 받는 방법”의 한 분깃이기 때문이다.

홍수 이전에 의인으로 칭함을 받는 사람은 한명 뿐이 없었다..

즉 노아 이외에는 의인으로 인정을 받은 사람은 없다.

즉 노아의 가족들은 의인이기 때문에 홍수의 멸망을 비켜간 것이 것이 아니다..

이들은 단지 노아의 의로 인하여 목숨을 건진 것이다.

노아의 홍수로 멸망당한 수많은 사람들(수십억이 넘는다고 한다.)

이 노아의 방주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에 모두 지옥에 갔다고 주장하는 것 또한 선입견에 의한 오류이다.

 

노아의 가족들이 의인이어서 목숨을 건진 것이 아니듯 노아의 방주에 들어기지 못한 모든 사람들이 모두 죄인이어서 죽은 것이 아니다.

최소한 노아의 방주에 들어가지 못한 임산부의 아기들이나 선과악을 구분하지 못하는 어린아이들은 그들의 죄를 물을 수가 없다.

하지만 이들은 분명이 다 죽었다.

 

우리는 한 사람의 죽음이 반드시 죄와 연관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누가복음 13:4] 또 실로암에서 망루가 무너져 죽은 열 여덟 명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보다 더 악한 죄인들이라고 생각하느냐?

이 예수님의 질문은 대한 답은 "아니다". 노아의 가족들이 홍수로 죽은 아이들보다 덜 죄인이어서 홍수에서 살아남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경륜을 나눌때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첫째 사망과 둘째 사망을 명확하게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다.

노아의 홍수로 죽은 수많은 어린아이들은 마지막 날에 (백보좌 심판) 앞에서 부활할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대부분 민족적인 심판은 대부분 영혼에 관한 심판이 아니라 육신의 심판이다.

이 심판은 개별이 아니라 단체적이다.

이러한 심판은 영원히 지옥에 가느냐 영생을 얻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육신이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이다.

 

홍수이전과 이후의 경륜과 바벨탑 사건의 경륜을 나누는 이유는 영혼에 관한 관점이 아니라 지상에서의 육체의 삶이 크게 전환되기 때문이다.

홍수 이전과 이후 여러가지가 땅에 변화가 생기는데...

사람의 수명이 줄어들고 지상에 커다란 변화가 생긴다.

 

창9:11 내가 너희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육체가 홍수로 인한 물들로 멸망당하지 않을 것이며, 또 땅을 멸망시킬 홍수가 다시는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즉 이 멸망은 육체적 죽음이지 결코 지옥에 가는 심판이 아니다.

바벨탑 사건 이후로는 모든 민족들이 언어로 나누어 지고 흩어진다.

즉 성경에서의 대부분의 경륜을 나누는 이유는 땅에 대한 변화가 생겼을 경우이다.

 

경륜의 변화는 영혼 구원의 방법에 대한 변화가 아니다.

이 부분이 하나님의 경륜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실수이다.

 

이 시기에도 구원받는 방법은 변화가 없다.

죄에서 돌이키는 것이다. 이 죄는 반드시 율법을 어기는것을 말하지 않는다.

 

[욘4:11]자기들의 오른쪽과 왼쪽도 분별할 줄 모르는 십이만 이상 되는 사람들과 많은 가축들이 있는 저 큰 성읍 니느웨를 내가 아끼는 것이 부당하냐?" 하시니라.

(마 12:41,) 『,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파로 회개하였기 때문이라.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일어나서 이 세대를 정죄하리니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위대한 이가 여기 있느니라.』

 

이방인 나라 니느웨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지 않았다..

이들은 죄에 대한 회개로 구원을 받았다.

욘 1:2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들에게 외치라. 이는 그들의 죄악이 내 앞에 닿았음이라." 하셨으나

욘 3:8 사람이나 짐승이나 굵은 베를 쓰고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게 할지니, 정녕, 그들 각인으로 자기의 악한 길과 자기 손에 있는 난폭함에서 돌이키게 할지니라.

 

니느웨의 수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실 것을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를 뉘우치고 죄악에서 돌이켰다.

즉 선악과를 먹은 이후 혼의 구원에 관한 방법은 거의 변화되지 않는다.

이 내용을 바울은 이렇게 정리한다.

 

롬2:9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10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11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

  

죄의 욕망이 네게 있으니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처음 이 메시지와 상응한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선을 행하는 것이다.

 

[로마서 2:15]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처럼 세세한 율법은 지킬수는 없지만 양심에 기록된 율법의 행위를 지킬 수 있었다.

율법은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것이지 결코 이방인들에게는 주어진 것이 아니다.

즉 이방인들은 여전히 양심의 경륜 안에 있었다.

어째든 율법을 잘 지켜서 구원을 받을 수 있었듯이 양심을 잘 지켜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

 

예수님의 공생에와 십자가 이전 경륜(메시아 경륜)

 

이 시기는 거의 4년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성경 복음서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 시기에 예수님의 하신 말씀을 마치 전 시대에 적용되는 것처럼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복음서에 기록된 대부분의 말씀은 엄밀히 말하면 구약이다.

예수님은 율법하에 계셨고 율법을 다 지키셨다.

이 시기는 아주 복잡하고 중요한 시기이다.

예수님은 이 시기동안 하신 말씀은 자신이 메시아이며 천국이 가까왔다 천국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회개하라는 메시지 였다.

간단히 요약하면 이 시기는 이방인들인 우리와는 관련이 적은 시기이다.

즉 이스라엘에게 예언된 메시아 왕국을 선포하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사야서에 언급된 죄값을 치르는 어린양 마저도 이스라엘이 중심이다.

 

[마10:6]다만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마15:24]주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보냄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하시니

 

어째든 이시기에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잘 이해하여야 한다.

여기서 우리가 보통 모든 시대는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받는다는 교리의 구절들을 살펴보면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사람은 아무도 없느니라.

 

이구절은 이러한 교리를 주장하는 구절이 된다.

 

하지만 이러한 구절은 "부분적 진리"가 "전체의 진리"가 될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을 말이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사람은 아무도 없는가?

이것은 진리이다. 하지만 모든 시대에 진리는 아니다.

한 예로

창 5: 23에녹의 모든 날들이 삼백육십오 년이었으며

24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없어졌더라. 이는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셨음이라.

 

창세기의 에녹이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께로 갔는가? 물론 이 하나님을 아버지가 아니라 예수님이라고 주장할수 있다. 하지만 분명히 알아야 할 점은 성자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몸을 입기 이전에는 예수라는  이름을 받지 않으셨다는 점이다.

 

이 두 구절의 상반된 모순처럼 보이는 구절들은 서로 모순이 아니라 다른 시점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했을때 그는 "도마"이다.

4 내가 어디로 가는지 너희가(제자들) 알고 또 그 길도 너희가 아노라." 하시니

5도마가 주께 말씀드리기를 "주여, 우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모르는데 어떻게 우리가 그 길을 알 수 있나이까?"라고 하니

 

1차적으로 이 구절은 도마에게 자신 예수님이 아버지께 가는 길임을 계시하시는 것이다.

도마 앞에서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가는 방법은 자신을 메시야로 믿으라는 것이고 다른 길은 없다고 말씀하셔야만 한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열심히 착하게 율법을 잘 지켜야 아버지께로 갈수 있다고 말할수 있는가.. 설령 그것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된다..

왜냐면 지금 구원 자체가 되시는 메시야가 앞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도마에게 향한 메시지는 2차적으로는 우리에게도 해당될수 있다.

현재 착하게 살면 구원받을수 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이미 잘못을 저지른 죄인에게 이러한 메시지가 무슨 소용인가? 지금 죄인에게 필요한 메시지는 뉘우침이나 회개가 아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영접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도 은혜의 복음은 없다..

왜냐면 예수님이 아직 피를 흘리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을 메시야로 영접하는 것과 부활을 믿고 구원받는 것은 전혀 다르다.

하나는 왕을 영접하는 것이고 하나는 구속주를 영접하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이 도마에게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했을때 예수님을 통하지 않으면 아버지께로 갈자가 없다고 말한 이 순간에도 은혜의 복음은 없다..

 

도마는 여전히 대속으로 죄를 용서받을수 없다.

도마는 예수님을 대속주로 믿지 않았다.

그는 예수님의 죽으시고 난뒤 부활을 믿지 않았고 책망받았다.

 

이 순간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따라야 구원을 받는 것이다.

한가지 더 예를 들자면

이시기 한 청년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더 이해가 될 것이다.

 

막10:17 그 후 주께서 길에 나가시니 어떤 사람이 달려와서 주께 무릎을 꿇고 묻기를 "선한 선생님, 내가 영생을 상속받으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리이까?"라고 하니  

21 그러자 예수께서 그를 쳐다보시고 사랑하시며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너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가 가진 것은 무엇이든지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 있는 보물을 가지게 되리니 그런 후에 와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시더라.   22 그러나 그는 그 말씀에 슬퍼하고 근심하며 가니 이는 그가 많은 재산을 가졌기 때문이라.   23 그때 예수께서 주위를 둘러보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재물을 가진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라고 하시니   24 제자들이 그의 말씀에 놀라더라. 그러자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자녀들아, 재물을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25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쉬우니라."고 하시니  

 

윗구절이 단순히 비유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비유가 아니라 사실이다.

이 부자 청년은 복음을 통하여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이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영접하고 재물을 버리고 따라가야 한다. 

지금 우리는 이 부자청년처럼 예수님을 따를때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르지 않는다.

아니 예수님을 계시지 않기 때문에 따를 수도 없다.

그리고 지금은 부자들도 은혜 복음을 통하여 얼마든지 쉽게 구원을 받는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이 메세지는 부활의 복음이 아니다.

이 메시지가 진리이긴 하나 그 당시 이 메세지로 구원받기는 쉽지 않았다.

제자들이 오는 세대에서 복을 누리는 이유는 그들이 부활의 복음을 믿어서가 아니라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기 때문이다.

 

그때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말씀드리기를 "보소서, 우리는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주님을 따랐나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갖게 되겠나이까?"라고 하니 28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를 따르는 너희들은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새 세대에,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29 누구든지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내나, 자식이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일백 배로 받을 것이요 또 영생을 상속받으리라

 

우리는 영생을 상속받지 않는다. 우리는  거듭난다. 거듭나는 것과 영생을 상속받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사람은 아무도 없느니라.

이 "길","진리""생명" 되신 예수님을 도마는 이미 알고 있었고 따르고 있었다.

 

이 구절은 우리가 생각하는 믿음으로 구원받는 부활의 복음에 관한 메시지가 아니다.

원뜻은 예수님 당시 모든 것을 버리고 메시야를 따라가야 하는 행위로 영생을 상속받는 실제적인 메시지인 것이다.  즉 특정시대에 특정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인 것이다.

 

[사도행전 4:12] 그러므로 다른 이에게는 구원이 없나니, 이는 하늘 아래서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다른 이름을 인간에게 주신 적이 없음이라."고 하더라.

 

또 이 구절에서 구원받을수 있는 다른 이름을 인간에게 주신 적이 없음이라는 내용을 사람들은 모든 시대에서 예수님을 모르기 때문에 지옥에 갔다고 주장한다

분명히 구원받을수 있는 이름은 이전에도 주신적이 없고 이후에도 없었다. 이것이 전부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한번도 대속할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 그렇다고 죄를 짓지 않은 이들을 지옥에 보냈다는 말씀은 아니다.

 

구원이 필요한 사람은 죄를 지은 죄인이다.

 

[로마서 3:23] 이는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다가

이러한 구절처럼 모든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지 못한다 라고 주장하기 좋은 구절이 없다.

여기서 우리는 이 모든 이라는 단어를 잘 이해하여야 한다..

성경에서 모든은 예외없이 모두가 아니다.

모두라고 해서 이 구절에 아기들이 들어간다면 어떨까..

 

아기들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다가..

 

[마가복음 10:14] 예수께서 그것을 보시고 몹시 언짢아하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들의 것이니라.

 

[마태복음 18:3]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회심하지 아니하고 또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영광에는 이르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나 천국은 갈수 있는가?

문맥상 그렇지 않음을 잘 알것이다.

 

로마서는 로마에 있는 믿지않는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이들에게 보낸 서신이다.

1차적으로 바울은 믿지 않는 로마에 있는 시민들을 염두해 두고 서신을 썼다.

여기에는 아기들이나 정신지체 장애인들은 포함되지 않는다.

최소한 바울의 글을 읽는 사람은 최소한의 지적 능력을 지닌 이들이다.

이곳에는 바울은 자신의 서신이 노아나 욥과 같은 의인들은 읽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이곳 로마에는 거의 의인은 전무하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 앞장에서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의 죄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죄인임을 자각하도록 찔림을 준다.

여기서 모든 사람은 제한된 모든 사람이다.

그리고 제한된 시기의 모든 사람이다.

천년왕국과 영원시대로 들어가면 여기서의 모든 사람은 다 빠진다.

누군가 천년왕국 시대나 영원시대로 들어가서 이구절을 읽어주면 모든 사람이 죄인이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라고 주장한다면 어떨까..

 

애놋에게 이구절을 읽어주며 당신은 모든 사람에 포함되므로 하나님께 갈수 없소 라고 말할수 있는가?

 

우리는 보편적인 진리와 제한적인 진리를 구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세상을 창조하셨다." 노아의 홍수는 역사적 사실이다. 예수님은 부활하셨다.등등

과거의 사실들은 보편적인 진리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제한이 없으며 변동이 없으며 해석의 여지가 없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만이다.

하지만 앞서 설명한대로 어느 특정 시대나 대상에게 하신 말씀이 있다..

이러한 진리들은 모든 이들에게 해당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안식일을 지켜라, 절기를 지켜라, 행위로 구원을 얻으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등등...

 

성경에는 모순처럼 보이는 말씀들이 많이 있다.

즉 어떤 구절에서는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뚫는 창을 만들었다는 구절이 있고..

어떤 구절에서는 어떤 것도 막을수 있는 방패를 만들었다는 구절이 있다.

이러한 두 내용은 서로 모순을 일으킨다..

이러한 모순을 해결할 방법은 시간적 차이 혹은 지역이나 대상에 차이를 두는 것이다.

어제까지는 모든 것을 뚫는 창이 있었고  오늘부터는 모든 것을 막는 방패를 창조하는 것이다.

아니면 제한된 지역이나 대상에게 국한 시키는 것이다.

서울지역에서는 모든 것을 뜷는 창이 우선이며, 강원도 지역에서는 모든 것을 막는 창이 우선이라고 정하면 된다.

 

여기에 답이 있다.

우리 조상들은 2000년 전부터 최근 100년 전까지 복음을 전해들은 적이 없다..

이들에게 부활의 복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전혀 구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왜냐면 하나님을 알만한 것들이 그들 속에 있기 때문이다.(롬1:19)

그것이 바로 양심이다.(롬2:15)

로마서 1~3장에서 말하고자 한 결론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결국은 행위대로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다.

 

9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혼에게 환란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이방인에게며

10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이방인에게라.

11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으시기 때문이라.

9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혼에게 환란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이방인에게며

 

 

롬2:6 즉 이 로마서에서 바울이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분명하다.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결국 행위대로 심판을 받는다는 점이다.

이 심판은 물론 백보좌 심판이란 점이다.

심판을 받는다고 모두 지옥을 간다고 오해하면 안된다...

로마서 2: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으로 하시고

즉 백봐좌 심판석에 생명책이 있는 이유가 여기 있다.

 

[요한계시록 20: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이 생명책은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책이 아니다. 이들은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지 않는다.

왜냐면 예수님께서 대신 심판을 받으셨기 때문이다.

이 생명책은 복음을 접하지 못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선한 행위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의 명단인 것이다.

 

아담의 타락이후부터 새하늘과 새땅 이전의 모든 시대에 있어 구원받는 방법은 거의 동일하다..

 

로마서 2: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으로 하시고

단지 참고 선을 행하여 구원을 받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의인들의 기록들을 보면 그들이 그렇게 쉬운 삶을 살지 않았음을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부처가 해탈을 얻기 위해 고행을 했던 것처럼 의인들의 구원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니였다.

 

로마서 3:7절은 아직까지 유효하다.

여전히 복음을 알지 못하는 이들은 영생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해 참고 선을 행하여야 한다.

 

 

4. 십자기 이후의 경륜

 성경을 오해하는 이들이 실수 하는 부분이 이부분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기점으로 예수님 이전에는 예수님이 죽으실 것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예수님이 십자가 사건 이후로는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십자가 사건 이후로는 예수님을 모르고 죽은 이들은 모두 지옥에 같을 거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교리는 이슬람교의 깃발처럼 한손에는 코란과 한손에는 칼을 들고 믿지 않으면 죽인다라는 메시지를 전파하며 아주 비합리적인 종교중에 하나로 전락시켜 버렸다.

 

비유가 적절하지 않을지는 모르겠지만

복음을 쉽게 말하면 당첨된 로또 번호를 알려주는 것과 같다.

우리는 돈을 버는 방법은 그리 쉽지가 않다. 사업을 하든지 월급쟁이를 하든지 각자에게 주어진 액수가 있다. 우리는 그것을 벌어야 행복 성공했다라고 한다.

만일 우리에게 당첨된 로또 번호를 안다면 그리고 그 액수가 줄어들지 않는다면...

우리는 값없이 알려줄수 있다.

 

우리는 로또 번호를 듣지 못한 이들에게 당신들은 이 번호를 몰랐으니 모두 실패한 거이요 라고 말할수는 없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방법에 엄청난 변화가 생겼다.

오직 믿음으로 어떠한 선한 행위도 없이 아무런 조건없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린것이다.

그래서 이 시대를 은혜의 경륜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한가지 의문이 생긴다.

복음을 듣지 못한 은혜의 경륜안에 살고 있는 수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많은 기독교인들은 단순하게 생각한다.

구원은 예수님을 믿어야만 얻으니 복음을 모르는 모든 사람들은 지옥에 간다..

 

이것이 지금의 보편적인 기독교 안에서의 교리이다.

 

은혜의 경륜이 끝난후 다음과 같이 몇가지 경륜으로 나누어진다. 이부분에 대해서는 간단히 언급한다.

 

 

대환란의 경륜

은혜의 경륜은 영원하지 않다. 이 시간은 휴거와 더불어 끝난다.

이후 이젠 행위와 믿음 모두 필요하다. 이 시대는 양심만으로 부족한데 짐승표를 받지 말고 짐승에게 경배도 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의롭고 착한 사람이더라도 짐승표를 받는다면 그는 구원을 장담할수 없다.

이 시대는 다른 장에서 많이 언급하였으므로 생략하겠다.

 

천년왕국의 경륜

이 시대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직접 이땅을 왕으로써 통치하신다.

이젠 복음나 양심에 따른 행위도 불필요하다. 왜냐면 예수님께서 완전한 법으로 통치하기 때문이다.

이 시대는 구약의 신정 통치처럼 아주 엄하다.

아담의 육신을 지니고 이 땅에 들어온 수많은 사람들은 괴로울 수도 있다.

그들의 죄의 성품이 그들을 충동질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철장으로 그들을 다스린다.

결국 그들은 천년동안 참다가 결국 반란을 일으킨다.

이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사람들은 영원한 구원을 얻을 것이다.

 

새하늘과 새땅의 경륜

 

모든 죽은자의 심판이 백보좌 심판에서 거행되고..

이로써 영원이 시작된다.

 

 

결론을 다시 정리하자면

각각 시대마다 다른 방법으로 육신은 구원을 얻는다. 하지만 아담이후 은혜시대까지는 양심에 따라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영생을 얻거나 불못에 던져진다.

따라서 이방인인 우리 조상등 복음을 알지 못한이들이 전부 지옥게 간다는 주장을 옳지 않다.

즉 성경을 구분하여 해석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이 부분 때문에 실수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하나님이 다루시는 한 경륜은 중복되거나 겹쳐질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지금은 양심의 경륜과 복음의 경륜이 중복되는 시기인 것이다.

지금도 어린아이들과 어딘가에 복음을 듣지 못한 창조주를 두려워하고 양심적으로 살고 있는 의인이 있다면 그는 백보좌 심판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복음을 듣는다면 선한행위로 구원받으려는 그런 도박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