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륜/거짓을 구분함

[스크랩] 설교는 목사의 전유물인가?(목사의 설교권에 대한 성경적 고찰)

무형11 2015. 3. 1. 20:25

설교는 목사의 전유물인가?

(목사의 설교권에 대한 성경적 고찰)

 

 

우리 주위에 무의식적으로 당연하게 생각하거나 습관적인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당연한 일들 중에서 왜? 라는 질문을 했을때 쉽게 그 이유를 찾지 못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배하는 중에 가장 중요하고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목사님의 설교입니다.

이것을 "설교권"이라고 부르면서 함부로 넘볼수 없는 암묵적인 권한으로 받아 들여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배의 중심으로 자리잡은 목사의 설교권은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에 의문의 대상조차 삼지 않습니다.

 

 "이교도에 물든 기독교"라는 책에서도 보면 역사적으로 예배의 중심이 교회의 설교가 되면서 교회에서 성도간의 교제는 사라지고 가정에서 모이던 소규모 교회들은 특별한 한 두사람의 설교로 대체되면서 성도들의 교제가 아닌 듣는 예배로 전락하게되고 대형 교회를 나아갈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목사에 대해 성경에 어떻에 말하고 있는지 보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목사"는 성경에서 "목자(shepherd)"를 말하는 단어로서 말그대로 "양을 돌보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 단어는 성경에서 89번 언급되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직분의 개념은 [엡4:11][벧전2:25] 2구절만 언급되며 거의 대부분이 양을 돌보는 목동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양을 돌보는 사람이 수천 수만마리의 양을 양육하며 돌볼수 있을까요? 한가지 방법으로 가능한데 대형 공장에서 기계식으로 사육하는 하는 것입니다.

 

양을 "돌보는 사람"은 자신의 양을 알아야 하지만 양을 "사육하는 사람"은 양의 이름이나 어떤 상태인지 알고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요10:14)

양을 "돌보는 사람" 양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지만 "사육하는 사람"은 양이나 털을를 팔아 돈을 벌거나 잡아 먹습니다.

그들은 "양을 돌보는 것"을 "교인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것"으로 정의하고 그 말씀을 가르치는 일은 오직 목사 자격증을 가진 사람들만이 하는 일이라고 하고 그것에 대한 댓가로 십일조나 헌금으로 그들을 생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즉 수천 수만명의 대형교회는 목사들은 그들의 하는 행태를 보면 양을 "돌보는 사람"이 아닌" 양을 "사육하는 사람들"에 가깝습니다. 이것은 이런 대형교회 목사를 들을 탄생하게 만든 배경에는 목사를 "설교하는 사람"으로 가르치거나 정의함으로 가능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교회 타락의 주된 원인중에 하나가 목사의 설교권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먼저 앞서 우리가 알고 있는 직분의 개념의 "목자"는 성경에 2번 뿐이 언급이 안됩니다. 대신 "장로(elder:노인,연장자)","감독(Bishop,overseer;관리자,)"이란 이름으로 더 많이 사용됩니다. "양을 돌보는 자" "나이많은 연륜이 있는자" "관리 감독하는 자"로 조금씩 의미는 다르지만 교회에서 사용될 때에는 모두 같은 직분을 말하고 있습니다

한 예로 예수님을 혼들의 목자와 감독자로 같이 부르는데 역할에 따라 달리 표현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벧전2:25]이는 너희가 길 잃은 양들 같았으나 이제는 너희 혼들의 목자와 감독에게로 돌아왔음이니라.

딤전3:1-13절의 감독과 집사의 자격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데 목자로 언급하지 않는데 감독이 목자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교회에 목자들을 세웠다라고 하지 않고 장로들을 선입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목자의 역할을 장로가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장로들이 교회를 다스리고 말씀과 교리를 가르치는 일을 하는데 지금의 목사를 "장로"로 부른 것입니다.

[행14:23]두 사도는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선임하고 금식 기도하며 자기들이 믿는 주께 자신들을 의탁하더라.

[딤전5:17]잘 다스리는(감독의 역할)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사람으로 여기되 특별히 말씀과 교리를 가르치는 일에 수고하는 이들에게 그리할지니라.

벧전5:1-3 내가 너희 가운데 있는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도 장로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며 또한 장차 나타나게 될 영광에 동참하게 될 자라. 너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고 돌보되(목자의 역할) 마지못하여 하지 말고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익을 위하여 하지 말고 준비된 생각으로 하며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자들을 지배하려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즉 목자, 감독, 장로는 각각 다른 단어지만 이들이 하는 일은 "교회를 돌보고 감독하는" 동일한 직분을 감당한다는 사실을 알수 있습니다.

만일 지금 장로교에서 하는 것처럼 목사와 장로를 다른 직분으로 가르친다면 베드로는 교회에서 여러 장로들 중에 한 사람으로 목사의 수발을 들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즉 지금의 당회장 목사 아래에 부목사 장로 전도사 강도사등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성도들 중에 연륜과 성경 지식과 도덕적인 사람들 중에 집사을 뽑을 때처럼 "감독(목자,장로)"을 선출합니다.

물론 돌보는 일들 중에 말씀을 가르치는 일도 포함되지만 장로들 모두가 말씀과 교리를 가르치지는 것은 아니였습니다[딤전5:17]. 즉 성경을 가르치는 일은 주로 성경 교사의 역할이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스스로를 목자나 장로라고 말하지 않고 오직 전도자, 사도, 교사로 임명받았다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딤후1:11]이를 위하여 내가 이방인들의 전도자(설교자preacher)와 사도와 교사teacher) 임명을 받았느니라.

[딤전2:7]이를 인하여 내가 전도자(설교자 preacher)e와 사도로 지명을 받았으며,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을 말하고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노니,)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들의 교사(teacher)이 되었노라.

 

하지만 베드로는 스스로를 장로라고 말하는데(벧전5:1-3) 그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세우는 일을 감당한 것이 아니라 한 특정 지역교회(예루살렘 교회,갈1:18)에 머물며  교회를 돌보고 감독하는 사역을 감당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한 지역에 머무르지 않고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세우는 일을 즉 전도자의 일을 감당했기 때문에 스스로를 목자나 감독으로 표현하지 않은 것입니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설교자(preacher)는 "목자"가 아니라 "전도자"입니다.[벧후2:5][딤후1:11][딤전2:7][롬10:14][전7:27]

우리가 설교라고 알고 있는 "preaching"과 "preach"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가각 25번,140번 언급이 되는데  "전파"로 라고 번역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설교자로 번역된 "preacher"는 성경에 8번 언급이 되는데 "전도자"로 솔로몬, 노아, 바울, 복음을 전파하는자에게 언급이 됩니다.[전12:8][롬10:14][딤전2:7][벧후2:5]

 

성경에서 최초의 설교자는 "노아"이며  처음 언급한 사람은 "요나"입니다.

[벧후2:5]또 옛 세상을 아끼지 아니하셨으나 여덟 번째 사람인 의의 전도자(설교자,preacher) 노아는 구원하시고 경건치 않은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느니라.

[욘3:2]"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하여 전파하라고 한 것을 그 성읍에 전파하라(preaching)." 하시니

 

 

우리가 알고 있는 설교의 개념은 예배 시간에 "특정 직분을 부여받은 사람이 믿는 이들에게 은혜의 말씀이나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지 성경에서의 설교"preach"의 개념은 노아나 요나 처럼 "믿지 않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메세지를 전파하는 것"입니다.[행8:4][딤후4:17][고후10:14][행20:9][고후10:14]

 

즉 성경에서 일주일에 예배 시간을 정하고 당회장 목사가 혼자서 믿는 교인들에게 설교하는 것을 "설교"로 표현하는 구절은 단 한구절도 없습니다.

설교 즉 "전파"는 특정 직분을 받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전도(preching)가 바로 설교(preching)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설교권"이 라는 말은 하나님을 전할 "전파권" 쉽게 표현될수 있는데 . 하나님을 전할 권리를 특정 사람에게 부여하고 마치 전파를 권세 마냥 사용하는 것을 당연히 여기며 전파권이 누구에는 있느니 없느니 갑논을박하는 모습을 보면 개콘을 보는 듯 합니다.

 

 

장로회 헌법에 규정한 설교권 http://blog.naver.com/xaris7/9012949

장로는 설교권이 있는가? http://blog.daum.net/lee_ys/7023400

평신도 설교권 http://blog.daum.net/dwelling/3337842

 

[행5:42]그들이 성전에서나 각 가정에서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고 전파하는 것(설교)을 쉬지 않더라.

 

한 예로 집사였던 스테판이 유대인들에게 설교하다가 돌에 맞아 죽은 사건이 있었습니다.(행6:5~8:2)

 오늘날 스테판 집사가 교회에 있었다면  그는 교회에 봉사나 하고 강단에서 설교할 권한은 주지 않을 것입니다.

 

전파는 전해지지 않은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지..이미 전해진 사람에게 전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매주 예배 시간을 정해 놓고 예배당에 모여 하나님을 믿는 교인들을 매주 "전파를 한다"는 것입니다.

밖으로 나가 "전도 해야 할 사람들"이 매주 "전도 당하는 것"이 얼마나 우수운 일인지...

 

즉 많은 이들이 설교를 교회 예배당에서 "믿는 사람들에게 은혜나 감동을 말씀을 주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설교는 말 그대로 전도이며 목사가 설교를 해야 한다면 믿는 이들에게 설교해야 할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이들에게 설교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목사들이 하고 있는 설교 즉 "믿는 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일"은 "교사들"이 해야 할일입니다.

 

[행13:1]당시 안티옥에 있는 교회에는 몇 명의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었는데,

[고전12:28]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 행함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들이며,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여러 가지 방언들이라.

[엡4:11]그가 어떤 사람들은 사도로, 어떤 사람들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들은 복음 전도자(설교자)로, 어떤 사람들은 목자교사로 주셨으니

[딤후1:11]이를 위하여 내가 이방인들의 전도자(preacher,설교자)사도교사로 임명을 받았느니라.

[히5:12]그 때로 보면 너희가 마땅히 교사들이 되었어야 할 터인데 이제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기초 원리들이 무엇인지를 누군가가 너희에게 가르쳐 주어야 하니, 젖이 필요한 사람들이지 단단한 음식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되지 못하는도다.

 

현대 교회의 목사들은 교회 안에서 평신도가 자신보다 성경을 잘 알거나 잘 가르치는 것을 좋아할 수가 없습니다.

자신보다 성경을 많이 알거나 설교를 잘하면 그가 강당에서 자신의 자리를 양보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설교의 댓가인 월급을 받을 명분이 사라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학교를 나와 목사안수를 받은 목사만이 설교권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다음 구절은 목사들이 월급을 받아야 한다는  근거 구절입니다.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을 전하는(preach the gospel) 사람들은 복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명령하셨느니라".(고전9:14)

그렇다면 내 상이 무엇인가? 그것은 내가 복음을 전할 때(preach the gospel)에 값없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preach the gospel), 복음으로 인한 내 권리 다 사용하지 아니하는 것이로다.[고전9:18]

"만일 우리가 너희에게 영적인 것들을 뿌렸다면, 우리가 너희의 물질적인 것을 거둔다 해서 그것이 대단한 일이겠느냐?"[고전9:11]

 

하지만 윗 구절은 현대의 목사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구절인데 "복음을 전하는 것"은 말그대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해야 할 대상은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 믿지 않는 불신자들입니다. 즉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또 복음을 전파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믿는 교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감동과 은혜의 말씀을 설교하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대의 대부분의 목사들이 하는 설교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복음으로 살아야할 사람들"도 아닌 것입니다.

성경에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라고 표현한 구절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전적으로 헌신한 사람을 말하는데 이들은 교회를 돌보는 목자가 될수가 없는데 그들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전파되지 않은 지역으로 수시로 떠나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전도자들(복음을 전하는 자들)"과 "목자들" "교사들"을 구분합니다.

여기서 오직 전도자들 만이 물질에 대한 권리를 지니는 것입니다.

[엡4:11]그가 어떤 사람들은 사도로, 어떤 사람들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들은 전도자들(evangelists)로, 어떤 사람들은 목자들교사들로 주셨으니

 

즉 바울은 지역교회의 감독이나 목자가 아니였으며 믿지 않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설교자 : preacher) 였습니다.

[딤후1:11]이를 위하여 내가 이방인들의 전도자(설교자 : preacher)와 사도와 교사(teacher)로 임명을 받았느니라.

[딤전2:7]이를 인하여 내가 전도자(설교자 : preacher)와 사도로 지명을 받았으며,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을 말하고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노니,)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들의 선생이 되었노라.

[행20:7]그 주의 첫날 제자들이 빵을 떼고자 함께 모였을 때, 바울이 그들에게 설교(preached;전파)하되 다음날 떠날 준비를 하고 한밤중까지 설교(preached전파)를 계속하더라.

 

바울이 말한 "전도자들" 즉  "복음을 전하는(preach the gospel)자들"에  해당되는 사람은들 지금 구지 찾는다면 선교사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믿지 않는 지역에 가서 교회를 세워야 하기 때문에 지역 교회에서 물질적 지원을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파송(be sent)되지 아니하였는데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와 같이 "화평의 복음을 전하는 자(preach the gospel)들의 발과 좋은 일들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preach) 자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하였느니라."[롬10:15]

 

즉 이 파송받은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믿지 않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해 이들이 받아들이게 되어 교회가 세워진다면 지역 교회는 더 이상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필요 없어지게 됩니다. 

복음 전파는 믿지 않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지 이미 받아들인 자들에 필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복음을 전한는 자들"은 다른 믿지 않는 이들이 있는 곳을 찾아 다시 보내지게(be sent) 됩니다.

만일 이들이 교회에 정착하여 지역 교회의 목자가 되고자 원한다면 그들은 "양을 돌보는 자"들이 되고  복음으로 인한 권리[고전9:18]는 사라지기 때문에 그는 스스로 일을 하며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바울 이외에 "전도자"의 사역을 했던 사람은 빌립과 디모데가 있는데 [행21:8][딤후4:5]

이들의 사역을 따라 성경에서 찾아보면 이들은 여기 저기 복음을 전하며 한 지역 교회에 머물며 정착하지 않았음을 금방 알 수 있을 것입니다.[행18:5][행19:22][고전4:17][행8:35][행8:40]

다시 말해 이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들"은 지역 교회를 돌보는 목자의 사역을 감당 할 수가 없는데 복음을 전하기 위해 수시로 떠나야 하기 때문에 양들을 돌볼수 없는 것입니다.

 

즉 성경대로 교회가 세워진다면 현대의 대형 교회의 목사는 절대 만들어 질수 없는 구조인 것이다.

신약 성경의 대부분을 기록하고 교회를 세웠던 위대한 사도 바울이 왜 바울 목사라고 부르지 않는지 지금의 유명 목사들은 알고 있을 런지 모르겠군요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해했기 때문에 지역교회의  "교회를 돌보는 사람" 목자나 감독이 될수 없었으며,

중국에 수백개의 교회를 세웠던 워치만니가 능력이 없어서 대형교회의 목사가 되지 않은 것이 아닌 것입니다.

 

웃긴 것은 "복음을 전하는 자들" 은 물질에 연연하지 않는데 반해 오히려 물질에 대한 권리가 없는 "양을 돌보는 사람" 즉 목사들이 구약의 십일조를 강조하며 더 물질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윗구절은 결코 현대의 직업 목사들의 월급을 주기 위해 헌금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타지에서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설교자 : preacher)들의 생계를 위해 물질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스스로를 유대인으로 가르치며 성직자들에게 물질을 바치는 종교가 있는 이것을 성경에서는 니콜라파의 가르침이라고 합니다.  이것들을  사탄의 회당, 바빌론 종교를 따르는 창녀 교회라고 부릅니다.[계2:9][계18:2][계2:15]

성경에서는 돈을 받고 양을 돌보는 사람을 고용된 목자라고 부르는데(요10:12-13)

아이러는 한 것은 자신들이 돈받고 고용된 목사이면서 자신보다 더 비도덕한 이들을  삯꾼 목자라고 비난을 한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대로 목자(목사)는  "집사"나 "교사처럼 지역교회에 모이며 각자 자신의 직업을 지닌 신실한 성도였으며 단지 교회를 위해 직분을 감당할 뿐이였습니다. 결코 이들을 위해 교회에서 돈을 모아 월급을 준 일이 없으며 오히려 목자들은 양들을 돌보기 위해 열심히 일하였고[살후3:11][살후3:10] 그  물질로 어려운 성도들을 대접하였습니다.[딤전3:2, 5:16]

 

[살후3:8] 아무에게서도 양식을 거저 먹지 않고 도리어 주야로 수고하고 애써 일하여 너희 가운데 아무에게도 부담이 되지 않도록 했노라.

[살후3:10]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라 하였노라.

살후3:12 이제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런 자들에게 명하고 권하노니 조용히 일하고 자기 양식을 먹으라.

 

윗 바울의 명령은 교회의 결코 목자들(감독들, 장로들)을 제외한 일반 성도들에게 만  한 명령이 아니라. 교회 안의 "모든 자" 목자들, 집사들, 교사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구절입니다.

그 누구도 교회 안에서 성경을 잘 가르친다거나, 교회를 잘 다스린다해서, 월급을 주지 않았습니다.

오직 물질의 지원이 필요한 이들 즉 타지에서 믿지 않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만이 물질에 대한 권리가 있었습니다.

이런 명확한 성경의 가르침이 있음에도 고의나 무지로 진실을 감추고 성경보다는 목사 자신의 말만 듣기를 원하며, 자신이 성직자란 명분아래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일은 어떠한 경우에도 용납하지 못하며 그들을 따르는 교인들을 더욱더 무지가운데로 내몰 있습니다.

 

목사(장로)에 대한 송사는 두세 증인이 있으면 가능하지만 현대 교회는 교인들 중 반 이상이 떠나도 결코 목사자리를 내 놓는 경우는 보지 못했습니다.[딤전5:19]

즉 "집사"나 "교사"라는 직분은  그 직분을 감당하기 어려우면 스스로 그만두고 내려  놓으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목사"라는 직분은 목사 안수를 받는 순간 죽을때까지 목사입니다. 즉 돌볼 양이 없어도 목자인 것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목사의 정의는 "교단 신학교를 졸업한 후 목사 안수를 받아 타지역에서 초빙을 받은자"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목자의 개념과는 너무나 멀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정의한 목자(감독)의 정의는 "지역 교회의 성도중 결혼한 남자로서 신실한 자녀를 두고 있는 성경의 교리를 잘 아는 신실한 자 "딤전3:1~7 딛1:5~9임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든 바울은 여자 목자를 허락한 적이 없으며[딤전2:12] 신학교를 졸업하거나, 교단에서 안수를 받은 자만이 목자의 자격이 부여된다고 말한 적이 없으며, 목자나 장로는 타지역에서 파송된 사람이 아닌 지역 교회의 일원 중에 선출되었습니다.

  또한 교회는 목자(감독,장로) 한사람이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여러명의 감독자들이 있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딛1:5]내가 너를 크레테에 남겨 놓은 이유는 너로 부족한 일들을 바로잡고, 내가 명한 대로 각 성읍에 장로들(elders)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행20:28]그러므로 너희 자신을 조심하고 모든 양떼에게도 그리하라. 이들을 위하여 성령께서는 너희를 감독자들( overseers)로 세우셨으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로 사신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게 하셨느니라.

[엡4:11]그가 어떤 사람들은 사도로, 어떤 사람들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들은 복음 전도자로, 어떤 사람들은 목자들와 교사들(pastors and teachers;)로 주셨으니

 

교회는 결코 목사의 설교가 중심이 아닙니다.

만일 설교가 중심이라면 유명한 설교자의 감동적인 설교를 강대상 앞에서 녹음기로 틀어주는 것이 훨씬 효과적일 것입니다. 아니 집에서 듣는 것이 더 나을런지도 모르겠군요..

"설교권"을 통하여 목사들은 교회에 성직자 제도가 더욱 확고히 하고 자신들에 이득에 반하는 말씀만을 전합니다.

현대 교회의 대부분의 문제점과 교회의 타락은 이러한 목사들의 설교권으로 발생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지금의 설교는란 "감동을 주거나 은혜를 주는 것"이 아니라 설교는(전도preching)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 복음을 외치 것"입니다. 내가 직장이든 학교든 자신이 있는 곳에서 믿지 않는 자에게 복음을 전한다면 그것이 바로 설교(전도:preching)인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 단 한단어도 나오지 않는 "목사"라는 직업을 만들어 그들에게 설교권을 주고 매주 십일조를 바치면서 그들이 원하는 말만 듣게 되어 성경을 찾지도 의심도 하지 못하게 되어 정상적인 사고와 판단을 할수 없는 지경에 이르렇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을 조금만 찾고 공부하면 알수 있는 이러한 평범한 진리들을 배울수 있는 방법이 그것을 가르치면 그들의 생계가 위협이 된다는 사실이 참으로 답답한 현실입니다.

 

결국  교회의 모든 잘못의 문제는 성경에서 스스로 답을 찾지 않는 성도 개인의 게으름의 결과입니다.

설교(전도preching)라는 한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안다면 얼마나 지금의 교회가 성경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는지 금방 알수 있음에도 결코 그것을 의심하거나 찾아보지 않은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의 기본적인 진리들을 행하면 지금의 수많은 교단 조직들은 유지되기 힘들 것입니다.

설교권을 바탕으로  헌금과 십일조로  생계와 조직을 유지하는 수많은 목사들와 직분자들...

가장 크고 효율적으로 움직이는 교회인 가톨릭 교회를  하나님께서 음녀 교회로 판단받고 부르듯이 우리가 효율과 현실의 문제를  고민하는 사이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봐쟈 할 것입니다.

 

매트릭스의 빨간 약과 파란 약처럼 맘편한 거짓을 받아들일 것인가? 불편한 진실을 받아들일 것이가?는 각자의 몫일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진실을 믿지 아니여도 진실은 바꾸어질수 없다는 것입니다.

 

[딤후2:13]우리가 믿지 아니하여도 그는 항상 신실하시니, 그는 스스로를 부인하실 수 없음이라.

  

 

 

 

-나눔-

 

 

혹시 글 내용 중에 성경적이지 않거나 잘못 이해하는 내용 있다면 조언 바랍니다.

 

http://cafe.daum.net/dispen/prrp/9(신성남)이란 분의 글을 읽으면서
잘못된 교회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분조차도 성경적인 목사, 설교의 개념이 없는 것 같아 몇자 적어 봤습니다.

 

 

 

 

출처 : 하나님의 경륜
글쓴이 : 나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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