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륜/성경을 나누는 이유

하나님의 나라와 천국의 차이점

무형11 2009. 10. 22. 15:00

하나님의 나라와 천국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제 1 강 그리스도의 등장과 메시야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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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가지 나라>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는 크게 세 개의 왕국으로 볼 수 있다.

하나는 "하늘 나라"(heavenly kingdom) (셋째 하늘 고후12:2)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이고,

또 다른 하나는 "천국"(kingdom of heaven)이다.

 

"하늘 나라"는 "천상"이나 "낙원", 또는 흔히 "천당"이라고 불려지는 그곳으로, 성도들이 죽으면 올라 가는, 그야말로 하늘에 있는 나라다. 이곳은 의로운 혼들의 안식의 장소로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절대로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나라에 대해서 피상적으로 생각하지만, 이 나라는 피상적인 나라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저 하늘 위,

하나님께서 계신 셋째 하늘에 있는 나라로서, 이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실제적인 지옥불에 떨어지게 된다. 사람들은 죽음 자체를 인생의 고해에서 빠져 나가 쉬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결코 쉬지 못하고 영원한 고통을 당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한 마디로 말하면 영적인 나라다. 따라서 그 나라는 죽어서만 가는 나라가 아니라 이 세상에 살면서도 동시에 들어갈 수 있는 나라다. 우리가 육신으로는 대한민국의 백성일지라도 영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이 나라에 들어 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반드시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만이 이 나라에 들어오게 된다(요 3:3,5). 따라서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은 내세에 하늘나라에서 누릴 축복들을 이 땅에서 성령님과 더불어 경험하며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반면 "천국"은 이 두 나라와는 달리 이 땅에 실제적으로 세워질 나라다. 많은 사람들은 "천국"이라는 이 용어 때문에 "하늘나라"와 혼동하기도 하고, 또는 "하나님의 나라"와 같은 것으로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이 "천국"이라는 용어는 성경 전체에서 오직 마태복음에서만 나오는 용어로서, "천국"은 그 두 나라들과는 구별되는 하나님의 특별한 왕국이다.
이는 마태복음에서 "천국"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문맥을 보면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산상설교, 소위 말하는 "팔복"의 내용을 보더라도, 『영이 가난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온유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유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순결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3-8)라고 되어 있는데, 만약 천국이 하늘나라와 같은 내세의 한 장소를 의미한다면, 천국에 들어가는 길은 거듭난다든지 그리스도를 믿는다든지 하는 말로 설명되어 있어야 하나 여기서는 그렇지 않다. 또한 이 천국은 온유한 자들이 유업으로 받는 땅과 연관되어 있으며, 더욱이 "마음이 순결한 사람들"만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했는데, 그리스도인일지라도 하나님을 볼 수 있을 만큼 순결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또 같은 장 19절에서는 『누구든지 이 계명들 중에서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범하고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은 천국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라 불릴 것이요, 누구든지 계명들을 행하고 가르치는 사람은 천국에서 큰 사람이라 불릴 것이라.』는 말씀을 통해서 이 천국이 모종의 "행위"와 관계된 왕국임을 알 수 있다. 만약 이것이 하늘나라와 같다면 행위와는 전혀 관계없는 설명이어야 할 것이다. 오히려 우리의 구원은 에베소서 2:8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받는 것이다. 더욱이 마태복음 10장에서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들에게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는 왕국복음을 전파하라고 명령하실 때 『이방인들의 길로도 가지 말고, 또 사마리아인의 성읍에도 들어가지 말고, 다만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마 10:5,6)고 말씀하신 것은 이 천국이 유대인과 관계있는 특별한 왕국임을 분명히 알려 주는 것이다.
<천국의 제시>
그렇다면 이 천국은 언제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원래는 이 왕국이 그리스도의 초림 때 이루어졌어야 한다. 왜냐하면 침례인 요한이나 주님이나 또 열두 사도들도 모두 당시에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선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약성경은 바로 이 천국을 제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구약 시대 동안 그렇게 예언되었던 왕께서 나타나 이제 그 왕국을 제시하시는 것이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
신약성경 중 바로 이러한 천국, 즉 메시야 왕국의 모습을 자세히 보여주고 있는 책은 마태복음이다. 마태복음은 이 왕국이 어떻게 예언되었으며, 어떻게 그 왕께서 오셨고, 그 왕이 어떻게 거부되었으며, 어떻게 다시 오실까 하는 것들을 그 과정까지도 자세하게 제시하고 있는 책이다. 마태복음의 핵심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오신 예수님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마가복음은 종으로 오신 예수님, 누가복음은 인자로 오신 예수님, 그리고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을 다루고 있다. 여기까지는 대부분이 알고 있다. 사복음서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이라면 마태복음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은 다 알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마태복음에서 제시되고 있는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태복음에 제시된 예수님의 설교 등을 통해 좋은 교훈들은 많이들 받고 있으나, 정작 거기에서 "이스라엘의 왕"의 모습은 별로 발견하지 못한다. 이스라엘의 왕이라 함은, 이방인이나 교회의 왕이 아니라 유대인의 왕이라는 말이다. 이 말은 곧 구약에서 유대인들에게 예언했던 그 모든 것들을 한 몸에 지니시고 그들을 위해 왕으로 나타나신 분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4복음서 중에 철저히 유대인적인 책이다. 이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행적이나 설교나 기록들은 모두 그러한 관점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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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보에서 확인된 왕의 예언>
이것은 마태복음 1장에 나와 있는 계보에서부터 확인된다. 사람들은 보통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를 낳고, 또 낳고... 하는 이 계보에 무슨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인지를 간파하지 못하는데, 이 계보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그 왕께서 오시마하고 말했던 구약의 모든 예언들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는 것이다. 그 계보는 아브라함부터 시작된다. 아브라함은 유대인의 시조다. 이 점이 누가복음의 계보와 다른 것 중 하나인데, 누가복음에서 그 계보는 아담까지, 또 하나님에게로 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거기에서는 유대인을 특별하게 다루고 있지 않고, 전 인류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마태복음에서는 유대인들을 다루고 있기에 아브라함까지만 거슬러 올라가고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유대인과 관련해서 처음으로 언약을 받았고, 이삭은 그 언약을 상속받는다. 야곱에 이르러서는 열 두 지파가 형성되어, 이스라엘 민족을 이룰 조건을 갖추게 된다. 참고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히브리서 11:9에서 "약속의 상속자"라고 불리워지며, 이스라엘 민족이 형성되기까지 독특한 위치를 점유한다.
열 두 아들들 중에 이 계보를 이어받는 사람은 야곱의 넷째 아들인 "유다"이다. 장자인 르우벤은 이 계보를 이어받지 못한다. 야곱의 가장 사랑받던 요셉도 이 계보를 이어받지 못한다. 사실 야곱도 장자가 아니었다. 따라서 족장들의 계보에서 "장자"라는 것은 크게 중요시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 계보를 이어받은 기준은 "장자권"이라기 보다는 "왕권"이었다. 야곱은 죽기 전에 열 두 아들들에 관해 예언을 하는데(창 49장), 그중 유다에 관한 예언이 바로 이 "왕권"의 모습을 보여준다. 『유다야, 너는 네 형제들이 찬양할 자라』(창 49:8). 이것은 유다가 왕권을 이어받는다는 예언이다. 『유다는 사자의 새끼로다』(창 49:9). 계시록 5:5은 어린 양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유다 지파의 사자인 다윗의 뿌리"라고 말한다. 『홀이 유다에게서 떠나지 않을 것이며 실로가 올 때까지 입법자가 그의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니, 그에게 백성의 모임이 있을지어다』(창 49:10). "홀"(scepter)는 왕권을 상징하는 치리봉이고, 입법자는 곧 왕이다. 왕 앞으로 백성들은 모이기 마련이다. 결국 유다는 왕이 된다는 예언이 분명해졌다. 파레스에서 살몬까지는 특별한 행적이 언급되지 않는다. 다만 파레스에서 이새까지의 족보가 다윗의 계보를 말하기 위해서 룻기 4:17-22에 기록되어 있다. 다윗은 명실공히 이스라엘 왕국의 왕이었다. 다윗 앞에도 사울이라는 왕이 있었지만, 사울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왕이 아니었기에, 실제적으로는 다윗 때에야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신정왕국의 형태가 갖추어졌다고 볼 수 있다. 다윗은 예언적으로 메시야 왕의 강력한 모형이다. 사무엘하 7:12-16에서 다윗이 하나님께 받은 언약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워 "네 집과 네 왕국이 네 앞에서 영원히 세워지리라. 네 보좌가 영원히 세워지리라."(삼하 7:16)고 하셨다. 이것은 앞으로 세워질 메시야 왕국이 다윗의 보좌라는 이름으로 영원히 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윗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취하셔야 했다. 마태복음 1:1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브라함의 아들과 동시에 "다윗의 아들"이라고 말한다는 것과 종종 군중들에게서 "다윗의 아들"이라고 불리셨다는 것은 이러한 점에서 매우 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뒤 이어 나오는 솔로몬은 다윗의 직접적인 아들이고, 예언적으로는 메시야 왕,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셔야 할 약속을 일차적으로 취할 수 있는 아들이었다. "다윗의 아들"이라는 점에서 솔로몬은 또한 메시야 왕의 강력한 모형인데, 전쟁의 사람이었던 다윗이 여러 번의 정복 전쟁을 통해서 이스라엘 왕국을 견고히 한 것이, 재림하시는 그리스도께서 무서운 심판으로 임하시는 모습을 예표한다면, 팔레스타인 땅을 크게 번영시키고 그 주변까지 평화롭게 평정한 솔로몬은 천년왕국에서 화평으로 치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가 된다 할 수 있다. 르호보암부터 여코냐에 이르기까지는 비록 악한 왕들도 있었지만, 그들 모두는 다윗의 아들로서 기름부음받은 왕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남왕국 유다의 왕들이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들과 달랐던 것 중 하나는, 북왕국의 왕들은 4대를 넘지 못하고 반역 등으로 왕조가 바뀌었던 반면, 남왕국의 왕들은 모두 다윗의 씨라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누가복음의 계보와도 다른 점이다. 누가복음의 계보는 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의 계보는 마태복음과 동일하다가도 다윗 이후에는 "나단"이라는 아들을 통해 마리아까지 내려가는 계보인 반면(누가복음 3:23에서 요셉이 헬리의 아들이라고 되어 있는 것은 실제적으로 마리아의 아버지인 헬리의 사위라는 말이다. 결국 누가복음의 계보는 마리아의 계보이다.), 마태복음의 계보는 "솔로몬"을 통해 내려오는 계보이다. 누가복음의 계보는 비록 다윗의 아들을 통해 내려왔지만, 그 아들들 중에는 보좌에 앉은 왕이 없었다. 그러나 마태복음의 계보에서는 포로기가 오기 전까지는 모두 왕이었다. 그래서 마태복음의 계보는 명실공히 "왕의 계보"(kingly line)가 되는 것이다.
 
 
<왕의 탄생>
결국 마태복음 1장의 주제는 유대인의 왕으로 오시는 다윗의 아들이라는 그 메시야가 어떻게 등장하는가를 보여주는, 예언의 성취를 다루는 것이다. 이어서 마태복음 2장은 그 왕이 탄생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서도 왕의 탄생 기사는 누가복음에서의 기사와 대조를 이룬다. 누가복음에서는 온 인류의 구세주로서의 그리스도를 그리고 있기 때문에,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묘사한다는 관점에서 마굿간과 말구유가 언급되고 있다. 그때 방문했던 사람들도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는 동방에서 온 현자들이 등장하고, 예루살렘 왕궁이 등장한다. 비록 새롭게 태어나신 그 왕께서는 화려한 예루살렘 궁전에 계시지는 않았지만, 더 이상 마굿간 구유에 계시지도 않았다. 그분은 이미 약간의 시간이 흘러 "집"에 들어가 계셨던 것이다(마 2:11). 그리고 그 현자들은 메시야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예물들, 즉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린다. 특별히 황금은 예수 그리스도의 왕되심을 위한 예물이었다. 더욱이 현자들이 예루살렘에 갔을 때 서기관들에 의해 인용된 미카서 5:2의 말씀은 "...이는 너에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 내 백성 이스라엘을 통치할 것임이라...", 즉 통치자 왕에 대한 예언이었다. 이처럼 마태복음에서 묘사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철저하게 왕의 모습이었다. 그것도 반드시 "유대인의 왕"의 모습이었다. 그분은 구약의 모든 예언을 한 몸에 지니신 채 등장하신 왕이시다. 구약의 모든 예언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대하게 만드신다는 것이었고, 그 민족을 통해 위대한 신정국가를 세우신다는 것이었다. 물론 다윗의 아들인 메시야를 통해서 말이다. 그들의 심판도 예언된 바이지만, 그들의 범죄로 인해 받게 된 그 심판 이후에는 반드시 회복이 뒤따르게 된다. 이 사실을 압축한 말씀이 바로 이사야서 40:1,2이다. 『너희는 위로하라. 너희는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의 하나님이 말하노라. 너희는 예루살렘에 다정하게 말하며 그녀에게 부르짖으라. 그녀의 싸움이 다 되었고, 그녀의 죄악이 용서받았나니 이는 그녀가 그녀의 모든 죄에 대하여 주의 손에서 배로 받았음이라』(사 40:1,2). 이스라엘이 그들의 죄로 인해 심판받고 다시 회복된다는 것, 이것이 바로 구약의 예언이다.
 
<왕의 선두 주자와 왕국의 형성>
이 예언을 앞세우고 마태복음 3장에서는 위대한 선지자, 침례인 요한이 등장한다. (보통 "세례 요한"이라고 하지만, 이 요한이 백성들을 요단강 물 안에서 침례를 주었다는 것은 모두가 인정하는 분명한 사실이다.) 이 요한은 흔히 "왕의 선두주자"라고 하는데, 이는 정확한 말이다. 즉 그는 왕께서 임하시는 길을 예비한 것이다. 누구의 길을 예비했는가? 바로 "왕"의 길이었다. 통치자의 길 말이다. 그래서 그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말했고, 마치 범죄한 왕 앞에서 담대하게 외쳤던 엘리야와도 같이 당시의 권력층들에게 담대하게 그들의 죄들을 지적하며 나타났다. 그가 외친 메시지는 왕께서 오시면 그 죄인들을 커다란 심판으로 치신다는 것이었다. 『그분은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철저히 정결케 하실 것이며, 알곡은 모아서 창고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로 태우시리라』(마 3:12). 선두 주자가 예비한 길을 따라 등장하신 분은 곧 메시야 왕이셨다. 마태복음 4장에서 시험받고 승리하신 그 왕께서는 이제 직접 사역을 시작하신다. 그분은 요한과 똑같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고 외치시고, 곧이어 수많은 이적들을 통하여 복음을 전파하셨다. 그 이적들은 주로 병자들을 치유하는 것과 마귀들을 쫓아내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명성은 이웃 지역인 시리아에까지 퍼지게 되었는데, 팔레스타인 전 지역에서 병자들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께로 몰려든 것이다.
『그러자 갈릴리와 데카폴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으로부터 큰 무리가 주를 따르더라』(마 4:25). 우리는 이 구절에서 왕국에 관한 매우 특별한 진리를 발견한다. 갈릴리는 팔레스타인 북쪽 지역이고, 데카폴리는 갈릴리 바다 동쪽 지역이고, 요단 강 건너편은 모세 때 갓지파와 르우벤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가 건너오지 않았던 요단 강 동편 페레아 지역이다. 즉 팔레스타인 전 지역이 예수님께 나아 왔다는 말인데(아직은 그리스도의 사역 초기로서, 백성들에게 거부당하시기 이전이다.), 이는 곧 그분의 왕국이 이루어 질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몰려든 지역으로 영토가 마련되었고, 그곳에서 온 사람들로 백성들이 마련되었으며, 왕께서 앞에 계시니 한 국가의 주권이 마련되어 있다. 영토와 백성과 주권은 국가의 삼요소다. 이제는 그분께서 왕으로 임하시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왕국 형성의 분위기가 무르익기 시작한다. 이제 남은 것은 왕께서 법령을 반포하시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 법령은 흔히 "산상설교" 또는 "산상수훈"이라고 불리워지는 마태복음 5-7장에서 제시된다. 많은 학자들이 산상설교를 "왕국 백성의 법도" 또는 "천국 시민의 법령"이라는 데에 동의한다. 이 부분은 다음 강의에서 살펴볼 것이다.
 
생각해 볼 문제
1. "하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와 "천국"은 어떻게 다른가?
2. 마태복음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3. 마태복음 1장은 예언된 메시야가 등장하시기 위한 어떤 과정을 제시하는가?
4. 구약의 예언은 이스라엘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
5. 마태복음 4:25은 왕국과 관련해서 어떤 의미가 있는가?
 
 

제 2 강 천국 복음의 융성과 쇠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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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서 "갈릴리 선지자"라 부른다. 이는 공관복음서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는 주로 갈릴리 사역이 대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이며, 또 그 사역이 초림 때의 주님의 사역을 특징짓기 때문이다. 앞 장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요한복음에 나타난, 명절을 중심으로 한 예루살렘-유대 사역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제시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사역이었다면, 공관복음에 나타난 그분의 공생애 대부분을 차지하는 갈릴리 사역은 다윗의 아들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주로 제시하며 "천국"을 전파하시는 왕의 사역이었다.
물론 그리스도의 초림 때의 전체 사역이 자신의 왕 되심을 전파하시는 왕국 복음의 사역임과, 갈릴리 사역에서도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의 기사에 따라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사역을 포함했음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공관복음에 뚜렷이 나타난 그분의 사역의 핵심은 자신을 지속적으로 유대인의 왕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것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복음서는 물론 마태복음이다. 마태복음에는 무엇보다도 유대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왕이라고 소개하고 있는 것이 강하고, 마가복음은 주님의 사역을 사건의 나열식으로 충분히 다루고 있으며, 누가복음에서는 갈릴리 사역 중 행하신 여러 설교들을 요약해서 다루고 있다. 갈릴리 선지자로서의 그분의 사역은 주로 설교와 이적들을 행함이었다. 그분이 행하신 이적들은 자신이 그 왕국의 왕이라는 분명한 표적으로 제시되며, 때로는 광야에서, 때로는 거리에서, 때로는 갈릴리 바다를 뒤로하여 선포하시고 설교하신 것에는 자신이 지금 구약에서 예언된 왕국(천국)의 왕으로 오셨다는 것과(마 5-7장), 이 왕국이 어떻게 거부될 것인가 하는 것과(마 13장, 막 6장), 왕이 없는 동안 그의 종들은 어떻게 사역해야 하는가 하는 것과(눅 19장), 자신이 마지막에 다시 왕으로 임하신다는 내용(마 24장) 등을 담고 있다. 물론 이 설교들 중에는 잃어버린 양을 찾으시는 목자의 모습이나 탕자를 받아 주시는 사랑의 아버지의 모습(눅 15장), 죄짐을 진 인생들에게 쉼을 주시는 하나님의 모습(마 11장),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아름다운 설교(눅 10장) 등도 간과해 버릴 수 없는 설교들이다. 이 외에도 갈릴리 사역에 포함되는 설교들은 많지만, 우리는 그 중에서 특히 산에서 하신 "산상설교"(마 5-7장)와 바닷가에서 하신 "천국의 신비"에 관한 설교(마 13장, 막 4장, 눅 8장)를 살펴볼 것이다. 이 두 설교는 주님의 초림 때의 사역을 잘 나타내 주며, 특히 천국의 현현과 감추어짐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핵심적인 설교라 할 수 있다.
 
산상설교, 천국 백성의 헌법
산상설교는 앞으로 현현될 왕국(천국)의 규례며, 왕국 백성들의 헌법이다. 그 안에는 구약의 율법보다 더 높은 의(義)가 제시되며, 어떤 왕국의 법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고귀한 도덕률을 담고 있다. 그래서 많은 설교자들은 이 아름다운 설교를 사랑하며, 여기에서 많은 영적인 교훈들을 얻고 있고, 오랫동안 이 설교는 그리스도인들의 윤리 규범으로 간주되어 왔다.
하지만 이 설교의 내용은 그리스도인의 윤리 규범으로 전혀 적용될 수 없다. 영적으로 교훈들을 얻을 수는 있지만, 여기에 나온 설교의 내용들을 규례로 삼을 수 없는 것은, 규례라 할 때는 문자적으로 지켜야 하는 규제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설교는 법 조항 같은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예로, 마태복음 5:21,22의 살인하지 말라는 내용은 "제1조 살인에 관한 규례," 5:23-26은 "제2조 예물과 화해에 관한 규례," 5:27-32은 "제3조 간음과 이혼에 관한 규례," 5:33-37은 "제4조 맹세에 관한 규례,"... 6:1-4은 "자선에 관한 규례," 6:5-8은 "기도에 관한 규례" 등이다. 또 형법들에 대해서는 오른 눈을 뽑고, 오른손을 자르고, 지옥불에 던져 넣을 정도로 엄격하다. 그것도 마음으로 범죄했어도 그렇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규례들을 율법의 연장선에서 말씀하셨다(마 5:17-19). 구약 율법은 유대인들에게 문자적으로 지켜졌다. 그러므로 이 새로운 율법도 누군가에게 문자적으로 분명히 지켜져야 할 규범이다.
많은 학자들도 산상설교가 이러한 규례들로 이루어진 것을 발견하고, 이 설교를 왕국 백성의 규범이라고 하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문제는 그들이 이 "왕국 백성"을 "교회" 또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왕국이 아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주"로 하고 "머리"로 하는 한 몸이요 유기체지만, 왕국은 그리스도를 왕으로 하여 이 땅에 문자적으로 세워질 정치적인 왕국이다. 특별히 우리는 이러한 왕국을 "천국"이라 부른다. 물론 하나님께는 영적 왕국인 "하나님의 나라"도 있고, 그리스도인들은 이 나라 안에서 영적인 통치를 받는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행동 규범이 있다. 하지만 산상설교에 나와 있는 규례들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의미에서든지 법령화된 율법에는 통제받지 않는다. 주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법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과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커다란 법은 바울 서신들에서 구체화되어 제시된다. 그리고 그것은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한 자유의 법이다(롬 8장).
사실 학자들은 이 왕국의 용어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들에게는 이 왕국을 "천국"이라고 부르든지 "하나님의 나라"라고 부르든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두 왕국이 같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실제적인 유대인의 왕국은 전혀 무시된다. 오직 교회를 통한 "영적 왕국"만이 있을 뿐인데, 이 영적인 왕국마저도 그 영역을 서서히 확장하여, 이 세상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각계에 걸쳐 널리 뻗친다고 한다. 이것은 전형적인 로마 카톨릭식의 왕국 해석이지만, 대부분의 개신교회들도 이 입장을 따르고 있다. 다만 카톨릭은 "카톨릭 교회"를 통해서 이 왕국이 확장된다고 하고, 개신교회들은 "복음"을 통해서 확장된다고 말하는 것이 다를 뿐이다.
그들도 구약성경을 말할 때는, 이 왕국이 이스라엘을 통해 이어져 왔다는 것은 안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는 갑자기 교회가 그 왕국의 계승자가 된다. 이 둘을 한 데 묶어, 그들은 이 왕국을 포괄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스라엘을 통해 이어져 오던 중, 이스라엘은 그들의 지속적인 반역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되었으며, 마침내 왕국의 주인이신 아들을 십자가에 처형함에 따라 그 왕국은 새로운 백성인 교회에게 이양되었다는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므로 이 왕국에서 영원하며, 하나님께서는 이 교회를 통해서 영원히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신다는 것이 개신교 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그들은 산상설교를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한다. 그래서 그들은 천국(그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영이 가난해야 하고, 애통해야 하고, 온유해야 하며, 의에 굶주리고 목말라야 하며, 자비로워야 하고, 마음이 순결해야 하고, 화평케 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마 5:3-9).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유일한 조건으로 "거듭남"을 말씀하셨다(요 3:3-5). 거듭남이란 죄인의 행위와는 전혀 관계가 없이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소위 "팔복"에 제시된 내용들은 하나같이 어떠한 "행위"를 강조하고 있다. 학자들이 이러한 사실을 인정한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과 구원받는 것이 동일한 것이 아니지 않느냐 하는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산상설교는 어디를 보아도 신약적인 의미에서 죄인들의 구원을 위한 구절은 하나도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요한복음에서 제시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구원과 직결된다. 그것은 거듭남을 통해 마귀의 가족에서 하나님의 가족으로 옮겨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산상설교가 행위에 의한 구원을 말하고 있다는 증거 중 하나는 이 백성들의 형벌에 대한 규례에서 나타난다. 그들은 까닭없이 자기 형제에게 노하면 "심판의 위험에 처하게" 되며, 형제에게 '라카'("바보"라는 의미)라 하면 공회의 위험에 처하게 되고, 더욱이 "어리석은 자"라고 비교적 가벼운 욕설이라도 하면 "지옥불의 위험"에 처하게 된다(마 5:22). 만약 산상설교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규례라고 한다면 이 조항은 삭제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로마서 8:38,39에 따르면 하늘 위나 하늘 아래나 어떠한 것도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떼어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로 보건대 산상설교의 규범은 미래에 세워질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 즉 "천년왕국"이라 불리는 천국 백성들의 규범이다. 율법을 말하고 있으나 구약은 이미 지났고, 현재 펼쳐 있는 시대는 교회의 경륜인데 교회는 율법과 관계가 없고, 따라서 이 설교는 율법이 다시 고개를 드는 미래의 다른 경륜에 해당되는 규범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산상설교를 "왕국헌법"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래에 펼쳐질 그리스도의 왕국은 율법으로 통제된다는 말인가? 그렇다. 그것도 구약의 율법보다 더 엄격한 법이다. 율법으로 통제받는 시대가 앞으로 다시 온다는 말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매우 생소하게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성경을 교회를 중심으로만 연구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성경이 분명히 가르치는 바는 교회 앞에는 율법이 있었고, 교회 뒤에도 율법이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교회는 율법과 전혀 관계 없는 몸이고, 미래에 율법이 부활해도 교회에는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한다. 한 번 그리스도의 몸으로 들어 온 사람들은 이후로 어떤 시대가 펼쳐져도 영원토록 보장받는다는 것이 성경적 진리이다.
율법의 부활은 대환란 때 일어난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휴거되어 올라 가면, 은혜와 믿음으로 통제받는 시대는 끝나게 된다. {너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는 말씀은 오직 교회 시대에만 한정된 말씀이기 때문이다. 반면 대환란이 시작되면 {여기에 성도들의 인내가 있으며 여기에 하나님의 계명들과 예수의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 있느니라.}(계 14:12)는 말씀이 효력을 발하게 된다. 그때에도 믿음("예수의 믿음")은 필요하지만, "오직 믿음"이 아니라 율법("하나님의 계명")과 함께한 믿음이다. 율법이 부활한다는 것은 유대인의 경륜이 부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율법은 유대인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고(창 12:1-3; 15:18-21) 다윗에게 확증해 주신(삼하 7:12-16) 유대인의 "영원한" 왕국이 교회 시대에 잠깐 끊어졌다가 교회 시대가 종결됨과 동시에 다시 이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환란 기간 중에는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겠고, 그들은 조상들에게 주어진 언약들을 기억하고, 또 그들의 메시야를 죽였던 것을 비롯하여 조상들과 자기들이 범한 죄들을 자백하는 가운데, 대환란의 큰 박해 속에서도 믿음과 행위로 인내하며, 2000년 전에 조상들이 거부했던 그 왕국이 나타나기를 소망하게 된다.
그들의 이러한 간절한 소망은 산상설교에도 잘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옵시고 아버지의 왕국이 임하옵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9-10). 소위 "주기도문"이라고 불리는 이 부분은 사실 대환란 기간에 왕국이 임하기를 기대하며 드리는 환란 성도들의 기도이다. 여기서 "아버지의 왕국"은 "천국"을 말한다. 만약 이 기도가 교회 성도들의 기도이고, "아버지의 왕국"이 영적인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라면 말이 안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 임해 있기에(눅 17:21) 다시 임하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왕국은 분명히 아직 임하지 않은 미래의 왕국을 가리킨다.
11절의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는 적그리스도가 경제권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환란 성도들이 매일의 양식을 위해 기도하는 모습을 잘 보여 준다. 물론 이 부분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영적인 적용이 충분히 가능하다. 그리스도인들은 욕심을 내서는 안되며, 부를 추구할 것이 아니라, 디모데전서 6:8에 따라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만족할 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환란 성도들처럼 이 기도가 간절한 사람들은 없으리라. 그들은 출애굽 때에 하나님께서 매일의 만나로 부양해 주셨듯이 초자연적으로 부양해 주시지 않는다면 도저히 살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용서해 준 것같이 우리의 빚진 것도 용서해 주옵시며}(마 6:12)는 산상설교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규례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보여 준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을 용서함으로써 용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용서를 해 주셨기 때문에 용서를 할 수 있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신약시대에 죄인이 용서받는 유일한 기초는 십자가에서 흘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피이다. 죄는 물로도 씻을 수 없고, 불로도 씻을 수 없으며, 오직 피로만 씻을 수 있다(히 9:28). 따라서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 주는 것은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께 용서받은 사람들이 마땅히 해야 할 도리이지, 자기의 죄를 용서받기 위한 조건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태복음 6:12이 신약 시대의 교리와 다르므로 성경이 모순된 것인가? 아니면 모순이 아니라고 말하기 위해서 마태복음의 본문을 억지로 영적으로 해석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마태복음 6:12 말씀은 철저히 문자적이다. 말 그대로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만이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말씀이 신약 시대의 교리가 아니라면 다른 시대의 교리이다. 즉 대환란 때가 되면 (구원의 영원한 보장을 받는 교회는 이미 휴거되어 하늘에 올라가 있으므로)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해야만 내 죄를 용서받게 되는 특별한 시대가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산상설교는 왕국이 임한 다음에 지켜야 할 규례들과, 왕국이 임하기 전에 왕국에 들어가기 위해 해야 할 행위들을 한꺼번에 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초림 당시에 왕으로 오셔서 자신을 왕으로 제시하실 때에, 바로 미래에 있게 될 왕국의 모습과 규례들, 그리고 그 왕국에 들어가기 전에 어떠한 일이 펼쳐질 것인가를 이 설교를 통해 알려 주신 것이다. 이것은 예언임과 동시에 선포이다. 어떠한 일이 펼쳐져도 그분은 왕이시고, 그것도 이 설교를 듣는 청중들의 왕이신 것이다. 그들은 왕에게서 설교를 들었다. 온 우주에서 가장 위대하신 분께서 한 육체를 입으시고 그들 앞에 앉으시어, 지금까지 전혀 들어보지 못했던 새롭고 놀랍고 위대한 가르침을 그들에게 주셨다. 2000년 전 갈릴리의 한 언덕에서 청중들의 귀를 울렸던 그 말씀은 참으로 위엄 있는 말씀이셨다. 이 위대한 선포를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예수께서 이 말씀들을 마치시니 그의 교리에 백성들이 놀라더라. 이는 주께서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분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마 7:28,29). 왜냐하면 왕의 말이 있는 곳에는 권위가 있기 때문이다(전 8:4)!
 

제 3 강 천국의 신비들
 
(천국이 신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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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설교에서의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은 참으로 권위 있는 왕국 복음의 선포였다. 그 안에서 청중들은 앞으로 펼쳐질 위대한 왕국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 왕국에서 메시야 왕께서는 친히 그들을 다스리실 것이며, 로마의 지배 아래서, 따분한 종교지도자들의 인도 아래서 희망 없는 삶을 살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그 메시지는 커다란 희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은 그분의 말씀 속에서 권위 있는 왕으로서의 모습을 보았고(마 7:29, 전 8:4), 잃어버렸던 왕국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었다. 더욱이 우리 주님께서는 여러 가지 기적들로 표적을 보여 주셨기 때문에, 적어도 백성들은 이분이야말로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이라고 느낄 수 있었다.
문제는 항상 그렇듯이 종교지도자들이었다. 그들은 당시의 기득권 세력이었으며, 그들은 당시에 그 백성을 인도하는 "목자들"이었다. 그들은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켜 놓아야 했고, 백성들이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했다. 그들은 백성들에게 메시야에 대한 소망을 지속적으로 갖도록 인도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의 전통에 묶여 전혀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들의 지위를 빼앗기기 싫었기에 정작 메시야께서 오셨을 때, 무지한 백성들은 그분의 표적을 보고서라도 그분을 믿었지만, 그들은 지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메시야를 거부했던 것이다. 중풍병자를 고치실 때는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비난했고(막 2:5-9), 마귀들을 쫓아내시면 오히려 예수님이 마귀들렸다고 욕했으며(막 3:22), 오천 명을 먹이신 그리스도를 본 후에는 너무도 우스꽝스럽게도 손 씻지 않고 먹는 것에 대해 트집을 잡았다. 안식일에 손 마른 자를 고쳐 주신 이후에는 예수님을 죽일 음모까지 세우게 된다.
그분에 대한 거부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예수님께서 아무리 표적들을 행해 주셨어도, 그들은 "보수-진보의 연합세력"을 구축하면서까지 그리스도를 반대했다(마 16:1). [마태복음 16장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함께 모여 표적을 요구했다고 되어 있다. 바리새인들은 당대의 보수주의자들이었고 사두개인들은 당대의 자유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모든 면에서 상반된 입장을 보였으나, 예수님을 시험하고 대적하는 자리에서는 하나가 되었다.] 예루살렘에서는 그리스도를 따르게 되면 출회할 것까지 결정해 놓았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들까지 보내시면서 그분의 왕국복음(천국복음)을 전파하셨지만, 그분의 왕국은 철저히 거부당했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사실들을 보시고, 그분의 왕국이 감추어지는 것을 예언하셨다. 그 왕국은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바요, 경건한 유대인이라면 누구라도 기다렸던 왕국이며, 이제 그 왕이 오셨는데 다시 감추어져야 하다니,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대신 그리스도께서는 그 왕국이 감추어지는 동안 새로운 시대를 제시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교회 시대이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고, 오직 그분을 신실하게 따랐던 제자들에게만 계시되었던 것으로서, 주님은 이에 대해 "천국의 신비들"이라 부르셨다(마 13:11).
이 "천국의 신비들"은 천국이 신비스러운 모습으로 감추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 그것이 감추어졌어야만 했는가? 그것은 유대인들이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 예언된 메시야의 왕국인 "천국"은 더 이상 그 역사를 드러내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제시하셨던 그 천국은 유대인들의 거부로 하나님께서 일정 기간 동안 거둬 가신 것이다. 왜 유대인들이 거부했다고 해서 천국이 사라져야 하는가? 그것은 그 왕국이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왕국이기 때문이다(삼하 7:12-16). 따라서 그 왕국은 유대인들이 다시 회심하여 그들의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까지 이 땅에서 "연기"된다.
그러면 왕국이 연기된 그 기간 동안 드러나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천국과 비슷한 또 다른 "왕국"이다. 이것이 바로 "천국의 신비"에 대한 의미이다. 천국이 사라진 다음에 등장하는 또 다른 세계, 우리는 그것을 지금 "기독교계"라고 부른다. 기독교계는 두말할 나위 없이 교회 시대 동안 펼쳐진다. 많은 사람들은 교회 시대에 펼쳐질 내용을 말하면서 천국의 신비들이라고 말하기에, 천국과 교회를 같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천국은 절대로 교회가 아니다.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어 팔레스타인 땅에 문자적인 다윗의 보좌에 앉아 치리하시는 왕국이고, 교회는 머리와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유기체다. 마찬가지로 "기독교계"도 절대로 "교회"가 아니다. 기독교계는 교회의 다른 형태가 아니라 왕국의 변질된 상태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이 "천국의 신비들"을 말씀하시면서 사용하신 비유들은 예수님께서 전파하신 왕국복음의 연장선상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지속적으로 왕국복음(천국복음)을 전파하시다가("은혜의 복음"이 아니다.) 이제 거부되셨다. 만약 그 왕국이 다시 회복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서 왕국의 경륜이 영원히 교회의 경륜으로 대체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왕국에 대해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이미 그 왕국은 없어졌고, 교회가 등장하여 주님의 인도를 받은 지 오래 되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영광스러운 교회만 기대하면 된다. 천년왕국에 대해서도 관심을 둘 필요가 없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유대인의 회복을 말씀하고 있으며, 그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찬란한 왕국을 세우실 것을 예언하고 있다(사 40:1-2; 11:1-16, 렘 31:31, 삼하 7:16, 롬 11:25-26, 계 11:15). 따라서 왕국이 전파되고 거부되었다고 해서 그 왕국을 무시하면 안된다. 왕국은 단지 "연기"되었을 뿐이고, 그 기간 동안에는 천국의 신비적인 형태(모조품 천국)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천국의 신비들"에는 일곱 가지의 비유가 포함된다.
1. 씨뿌리는 자의 비유(마 13:3-9,18-23)
이 비유는 전통적인 해석대로, 복음의 말씀이 뿌려졌을 때 반응하는 사람들의 차이를 설명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씀을 듣자 마자 마귀가 빼앗아가 버리고, 어떤 사람들은 말씀을 받으나 뿌리가 없으므로 곧 실족해 버리며, 또 어떤 사람들은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미혹으로 인해 열매를 맺지 못한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말씀을 듣고 깨달아 열매를 맺는데, 각각 100배와 60배와 30배의 열매들이다. 이 비유는 우리가 복음을 전파하는 것에 적용될 수 있으며, 우리의 복음의 열매들이 이와 같이 각기 다르다는 사실을 잘 보여 준다. 하지만 19절에서 뿌려지는 말씀은 "왕국의 말씀"이다. 다시 말해서 천국의 신비에서 말하고 있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전파하셨던 "천국복음"이다. 바리새인들은 이 복음을 들을 때 거부해 버렸고, 대다수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할 때는 빵을 먹으려고 따라다녔으나 곧 배교해 버렸고, 니코데모 같은 사람들은 두려워서 몰래 믿었으며, 열두 제자들은 열매를 맺었다. 그들이 30배의 열매를 맺었다면, 베드로, 야고보, 요한 이 셋은 60배를 맺은 셈이고, 그중 요한은 100배를 맺은 셈이다.
2. 독보리의 비유(마 13:24-30)
씨 뿌리는 자의 비유와 마찬가지로 이 비유도 주님께서 친히 해석해 주신다(마 13:36-43). 좋은 씨를 뿌리는 자는 인자, 곧 그리스도시요, 밭은 세상이고, 좋은 씨는 왕국의 자녀들이다. 독보리는 악한 자의 자녀들이요, 독보리를 뿌린 원수는 마귀이고, 추수는 세상의 끝이요, 추수꾼들은 천사들이다. 이 해석에 따라 비유를 다시 보면, 그리스도께서 세상에다 왕국의 자녀들을 뿌려 놓았는데, 사람들이 잠자는 동안 마귀도 자기의 자녀들을 뿌려 놓아 함께 자라게 한다. 종들이 마귀의 자녀들을 없애버리자고 제안하자, 주인은 세상 끝에 가서 심판 때에 악한 자들을 함께 모아 불못에 집어 넣겠다고 말씀하신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실 때 "천국은 ...과 같으니"라고 말씀하신다는 것, 즉 천국 안에 "독보리"인 악한 자의 자녀들이 있다는 것이다. 만약 이 천국이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성도들이 죽어서 가는, 셋째 하늘에 있는 낙원이라면 이 비유는 틀린 셈이 된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악한 것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천국과 하늘 나라는 다른데, 여기서 말하는 천국은 "천국의 신비"(마 13:11)라는 특별한 것으로서, 천국이 신비스런 형태로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특별히 이 시대에 이것은 모조품 왕국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기독교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천국은 유대인들에게 거부되어 연기되어 버렸기에 지금 이 땅에는 실제적인 의미의 천국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다른 무엇인가가 왕국의 이름을 걸고 등장한 것이다. 로마 카톨릭을 비롯하여 소위 교회라는 집단들이 천국의 이름으로 등장한다. 천국의 신비인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기독교계에는 하나님의 아들들과 마귀의 자식들이 함께 있다. 하나님께서는 원하기만 하면 마귀의 자식들을 모조리 없애버리실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고 놔두신다. 그 심판은 "세상 끝"에 있게 될 것인데, 그 심판의 방법은 천사들이 "가려내어 모아" 불 가운데 던지는 것이다. 이 일은 천년왕국 직전에 있게 된다. 이와 관련해서 마태복음 3:12에는 {그분은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철저히 정결케 하실 것이며, 알곡은 모아서 창고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로 태우시리라.}고 하시는데, 천사들을 "추수꾼"이라고 하는 것을 보아, "타작마당"이라고 되어 있는 이 구절은 같은 때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주께서 재림하실 때 의인들은 모아서 창고, 즉 천국으로 들이고 악인들은 모아서 꺼지지 않는 불로 태움받게 되는 것이다. 악인들은 지금 하나님의 섭리적인 움직이심으로 이미 모아지고 있다. 그들은 지금 자의로 모인다고 하며 온 세상에서 "연합"의 물결을 이루고 있지만, 그 연합은 결국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모으심으로 불 가운데 던져질 연합인 것이다.
이때 의인들은 "아버지의 왕국"에서 해처럼 빛난다고 되어 있는데, 이 "아버지의 왕국"은 천년왕국이다. 마태복음 6:10에서도 왕국을 기다리는 가운데 드려지는 기도는 "아버지의 왕국이 임하옵시며..."이다. 이 왕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므로 인자의 왕국, 즉 그리스도의 왕국과 동일시되는데, 이 왕국이 "아버지의 왕국"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고린도전서 15:24에서 {그후에는 끝이 오리니 주께서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폐하시고 그 왕국을 하나님, 곧 아버지께 바칠 때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버지의 왕국이라고 했다고 해서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지 않고 아버지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는 영원무궁토록 통치하실텐데, 그러면 언제 아버지의 왕국이 되겠는가? 예수님께서는 통치 초기에 이 왕국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선포해 놓으시고 그분이 친히 다스리실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 끝"이라는 것은 자연스럽게 대환란의 끝이 된다. 즉 왕국이 임하기 전까지의 모든 세상의 끝이라는 것이다. 대환란의 문맥인 마태복음 24:13의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에서 "끝"도 환란 성도들에게 대환란 끝까지 견디라는 말씀이다. 혹여 "세상 끝"을 천년왕국 끝에 땅과 하늘이 불로 소멸되어 버리는 끝을 말하는 것으로 오해할지도 모르는데, 성경은 그때보다 환란 끝을 "세상 끝"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천년왕국 자체가 "새롭게 되는 때," "만물이 회복될 때"이기 때문이다(행 3:19,21). 왜 그런가? 바로 이때 이 세상의 모든 정사와 권세를 폐하시고 그리스도께서 친히 통치하시기 때문이다. 그분의 통치는 이때부터 영원무궁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비유는 자연스럽게 전체 "천국의 신비" 기간 중 특별히 천국이 시작되는 시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3. 겨자씨 비유(마 13:31-32)
이 비유는 겨자씨 한 알이 자라서 나무같이 커져,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인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 비유를 잘못 이해하여, 우리 안에 있는 천국, 또는 하나님의 나라가 처음에는 겨자씨처럼 미약해 보이지만, 나중에는 큰 나무가 되어서 세상 사람들을 포용할 만큼 확장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커다란 오류이다. 천국은 결코 확장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일순간에 세워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공중의 새들"에 대해서는 4절과 19절에서 성경이 친히 해석해 놓고 있다. 주님은 4절에서 길가에 떨어진 씨를 새들이 먹어 버렸다고 하셨는데, 19절에서는 이에 대해 친히 해석해 주시면서,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악한 자가 그 사람의 마음에 뿌려 놓은 것을 빼앗아 간다고 하셨다. 따라서 "새들"은 악한 자, 즉 마귀들이다. 어떻게 천국 안에 마귀들이 있을 수 있는가? 그것은 천국이 사라진 다음에 등장하는 "천국의 신비"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다시 말해서 이 모조품 천국에는 하나님의 자녀들과 악한 자의 자녀들이 함께 거하게 된다는 것이다.
겨자씨는 원래 푸성귀 같은 풀이 되는 것이 정상이다. 따라서 겨자씨가 큰 나무가 되었다는 것은 비정상적인 성장이다. 이와 같이 기독교계도 비정상적으로 성장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복음으로 교회가 꾸준히 성장해야 하나, 로마 카톨릭이라는 창녀 교회와 교황이 천국과 왕의 모습으로 등장해서 기독교계를 혼탁하게 만든 것이다.
4. 누룩의 비유(마 13:33-35)
이 비유는 어떤 여인이 가루 서 말에 누룩을 숨겨 넣어 전체를 부풀게 했다는 비유인데, 이 비유만큼 잘못 해석되어 왔던 비유도 없을 것이다. 전통적인 해석은 여자가 교회며, 누룩은 복음이고, 가루 서 말에 넣어 전체가 부풀었다는 것은 교회를 통해 복음이 전세계적으로 전파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전적으로 틀린 해석이다. 성경에서 누룩이 긍정적으로 사용된 예는 단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누룩은 항상 부정한 것이고,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서도 누룩은 제거되어야 했다. 마태복음 16:6,12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누룩을 "거짓 교리"라고 정의하고 계시며, 사도 바울도 누룩을 제거하라고 말한다(고전 5:7, 갈 5:9-12). 또 성경은 교회를 "순결한 처녀"(고후 11:2) 또는 그리스도의 "아내"(엡 5:31,32)라고 말하나, 이 비유에서 여자는 "신부"나 "아내"로 등장하지 않으며, 단지 "어떤 여인"이라고만 제시된다. 그렇다면 거짓 교리인 누룩을 집어 넣은 이 여자는 누구인가? 바로 로마 카톨릭이다. 이 세상에 있는 기독교계는 거짓 교리가 팽배해 있고, 비정상적인 성장으로 부풀려 있는 것이다. 개신교회들도 로마 카톨릭의 교리에 물들어 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한국 교회가 성장했다고 말하나, 사실은 누룩으로 "부풀려"있는 것 뿐이다.
5. 밭에 숨겨진 보물의 비유(마 13:44)
이 비유는 이스라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성경에서 이스라엘은 "보물" 그것도 "독특한 보물"로 묘사된다(출 19:5). 여기서 주인공은 밭에서(밭은 세상이다. 38절) 보물을 찾은 후 다시 숨겨 둔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눈에 찾은 바 되었으나, 그들은 다시 세상 가운데로 흩어져야만 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후에 다시 보물을 취하시는데, 그때 그분은 단지 보물만 취하시는 것이 아니라 밭 전체를 취하신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왕국으로 임하실 때 이스라엘의 왕이 되시며, 또한 전세계의 왕이 되신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다시 밭에 숨겨진다는 말은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세상 가운데로 흩어진다는 것이다. 이 일은 대환란 때까지 지속될 것인데, 이때 이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외면당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보호가 없는 상태에서 극심한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인데, 그들의 부르짖는 모습은 시편에 잘 묘사되어 있다. {오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소서. 우리를 영원히 버리지 마소서}(시 44:23).
{오 하나님이여, 우리에게로 다시 돌이키시어 주의 얼굴을 비추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구원을 받으리이다}(시 80:3).
6. 진주의 비유(마 13:45,46)
보물의 비유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비유에서도 주인공은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판다. 모든 소유라 함은 그분의 생명을 뜻하며, 자신의 생명을 바쳐서 무엇인가를 사는 것을 말한다. 앞의 비유에서는 그 사는 대상이 보물, 즉 이스라엘과 온 세상인데 반해, 이 비유에서는 그 중에서 특별하게 진주를 사는 것으로 설명된다. 진주는 모든 보석 중 유일하게 유기체로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상징하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몸은 단순한 조직체가 아니라 유기체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피값으로 교회를 사셨다.
7. 그물의 비유(마 13:47-50)
갖가지 물고기를 모으기 위해 바다에 그물을 던져 놓고, 그물이 가득 차면 해변에 끌어올려,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은 내어 버린다는 이 비유는 두 번째 비유인 독보리의 비유와 유사하며, 역시 이 세대가 끝나고 왕국이 임하는 시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세상의 끝에도 그러하리라. 천사들이 나아와서 악인들을 의인으로부터 가려내어...}(마 13:49).
현재 세상에는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가 있다. 하나님 앞에 인간들은 물고기로 묘사된다. 최초의 제자들도 어부였고, 베드로에게는 특별히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고 말씀하셨다. 지금은 두 종류의 물고기들이 섞여 있지만, 세상의 끝에는 이 둘이 갈릴 것이고, 악인은 지옥불에 던져진다. 이 나누는 작업은 추수꾼인 천사들(39절)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이는 천국이 임할 때에 그 왕국으로 왕국의 자녀들을 들이기 위한 작업이다.
중요한 점은 이 비유들이 시기적으로는 교회 시대에 맞추어져 있지만, 왕국과 연관되어 설명된다는 것이다. 순수하게 교회 자체를 설명하는 비유도 있지만(진주), 왕국 복음이 아직 전파되던 "천국의 신비"의 초기라든가, 아니면 왕국이 임하기 직전 상황도 다루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 시대 전체를 다루는 이 "천국의 신비"는 교회 자체를 다룬다기 보다는, 왕께서 오셔서 왕국복음을 전파하시고 거절되셨다가 다시 왕국을 이루신다는 전체 왕국의 진행상황을 다루는 가운데에, 그 천국이 거절당했을 때 어떻게 되는가 하는 모습을 자세히 보여주는 비유들이다.
 
(교회와 왕국의 차이점)
교회 또한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그분과 함께 천국의 통치자가 될 것이기에 왕국에서 교회의 위치를 전혀 배제할 수 없다. 지금은 기독교계가 마치 왕국인 양 자리잡고 가짜 왕이 세력을 펼치고 있지만, 때가 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왕이 되시어 모든 거짓 것들을 무너뜨리실 것이다.
특이한 것은 마태복음에서 나온 이 비유들이 "천국의 신비들"이라고 불리는데 반해,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에서도 등장하는 같은 비유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신비들"이라고 불린다는 사실이다(막 4장, 눅 8,13장). 이러한 사실은 학자들이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를 같은 것으로 보는 결정적인 요인이기도 하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 "천국의 신비들"에는 앞에 제시한 일곱 가지의 비유들이 있는 반면, "하나님의 나라의 신비들"에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막 4:1-20, 눅 8:4-15)와 겨자씨 비유(막 4:30-32)와 누룩의 비유(눅 13:20,21)들만 있다. 반면, 마가복음 4:26-29에 나오는 "무의식적으로 성장하는 씨앗"에 대한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의 신비들"에만 있고 "천국의 신비들"에는 없는 비유다.
따라서 우리는 이 두 왕국이 같다고 볼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이 두 왕국 가운데 공통되는 요소도 있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미 말했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초림 때에 이 두 왕국을 전파하셨다. 주님은 이 두 왕국 모두의 왕이 되시며, 이 두 왕국은 그 본질에 있어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그 성격 면에서 공통되는 사항이 있으니, 바로 여기 제시한 공통된 비유들이다. 신비적인 형태의 천국에서도 복음은 전파되고 그에 따라 합당한 열매들이 맺혀진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마찬가지다. 물론 차이는 있다. 마태복음에서 이 복음은 "왕국의 말씀"이라고 제시되어 있는 반면,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에서는 "말씀" 또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되어 있어, 왕국복음과 은혜의 복음의 차이를 암시하고 있다.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거짓 교리들은 신비적인 형태의 천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안에도 있다.
 
이 시대에 하나님의 나라를 구성하고 있는 것은 거듭난 성도들로 이루어진 교회인데, 성도들이라고 모두 온전한 지식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요, 온전한 신앙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 가운데는 분명 누룩이 있고, 죄도 있다. 사실 정상적인 하나님의 나라에는 {성령 안에서 의와 화평과 기쁨}(롬 14:17)만 있어야만 하나, 실제적으로 현재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와 있는 성도들은 동시에 세상도 접하고 있기에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의 열매를 맺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그분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질 때까지 하나님의 나라도 역시 "하나님의 나라의 신비"인 것이다. [물론 여기서는 천국의 신비와 같이 천국이 거절당한 다음에 모조품 천국이 등장하는 것과 같은 형태로서의 하나님의 나라의 신비는 아니다. 천국은 유대인들에게 거절당한 다음 연기되었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에게 주어져서 계속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불 가운데 우리의 공력들이 심판받을 때까지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에는 아무리 경건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누룩에 오염될 수 있는 것이다. 단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과 혼과 몸을 온전하게 보존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며, 하나님의 거룩하신 말씀 가운데서 성결한 삶을 유지해야 할 것이고, 무엇보다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시어 우리의 죄 된 육신을 구속해 주시고, 그분께서 세우시는 왕국에서 함께 통치할 날을 고대하고 사모해야 할 것이다.

라킨의 하나님의 경륜 중 "왕국"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