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II
The Kingdom
13. 왕국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이후 이 땅 위에 "눈에 보이는" 왕국을 세우려고 하셨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창1:26-28).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이 통치권은 "타락"으로 잃어 버렸으며, 사탄이 "이 세상의 통치자"로서 세워졌다(마4:8-10,요14:30).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심"으로써 이 땅위에 눈에 보이는 "왕국"을 세우시려는 계획을 하셨다. 이후 모세, 여호수아, 재판관들, 다윗, 솔로몬, 이스라엘의 왕과 유다 등 바빌론 포로에 이르기까지 표면상 "유대 국가"라는 형태로써 이들에게 맡기셨으며, 즉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을 통하여 "신정통치"의 형태로써 다스리셨다.
사무엘이 재판관이던 시절, 백성들은 "하나님의 통치"에 대항하여 왕을 구했다. 그 결과 하나님은 백성들의 뜻대로 사울을 왕으로 주었다(삼상8:6,7).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여 뒤를 이으셨다. 하지만 다윗의 자손들의 잘못과 백성들의 우상숭배로 인해 B.C.606년에 "하나님의 통치"는 중단되고 "이방인들의 때"가 시작되었다.
1. 왕국이 가까움
The Kingdom at Hand.
"이방인들의 때"가 600년이 지난 후에,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 번 자신의 왕국을 이 땅 위에 세우고자 계힉하셨다. 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왕의 탄생을 알려 주었다(눅1:26-33).
30년 후에 왕을 예비하기 위해 침례인 요한이 왕국이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였다(마3:1,2). 그리고 왕이 자신을 드러내셨을 때 동일하게 외치셨다(마4:17-23). 그리고 후에 "12사도들"(마10:7)과, 예수님께서 보내신 "70명의 제자들"(눅10:1-9)도 동일하게 외쳤다.
그러나 왕은 거부되고 십자가에 못박임으로 왕국이 세워지는 것은 연기가 되었으며, "천국"이란 이름 아래 "신비적인 형태"로서 감추어졌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와 "천국(KINGDOM OF HEAVEN)"을 반드시 구분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시간과 영원, 하늘과 땅을 포함한 그의 창조된 모든 피조물 위에 우주적인 "하나님의 통치"이다. 즉 이것은 "볼 수 있게 오지 않으며" 영적이다(눅17:20,21). 이것은 "거듭남"에 의해 들어갈 수 있다.(요3:5) 그리고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의와 화평과 희락"이다(롬14:17).
"천국"은 신약에만 32번 언급되며, 오직 마태복음에서만 발견된다. 이것은 제12장 "천국의 비유"에서 설명하였으며(마13:1-50; 18:23-25; 20:1-16; 22:1-14; 1-30), 이러한 비유적인 형태로 우리는 "천국"은 공간과 시간에 제약을 받음을 알 수 있으며 이것의 영역은 "그리스도의 왕국"이라 불리는 세상부분의 영역이다. "천국"에는 선과 악이 있으며, "곡식"과"독보리",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 "현명한 처녀들"과 "어리석은 처녀들"과 같이 혼합되어 있다.
왕국의 연기
THE POSTPONEMENT THEORY
"왕국의 연기 이론"을 반대하는 몇몇의 사람들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에서 이 천국은 외면상 눈에 보이는 왕국이 아니라, 단지 영적인 왕국이며, 이것은 끊긴 것이 아니라, 오늘날 "거듭난" 믿는 사람들에 의해 보여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그리스도는 사람들의 구원자로서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시고 죽고, 죽음에서 부활하여, 아버지께 올라가시고, 왕국을 받으신 이후에도 지상에 눈에 보이는 왕국을 세우지 않았다는 것을 근거로 주장한다. 따라서 이때는 외적이며 눈에 보이는 왕국을 이 땅위에 "실제로" 건설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침례인 요한과 예수님께서는 표면적으로 눈에 보이는 이 땅위의 문자적인 왕국이 아닌 그 밖의 다른 의미로 말씀하셨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누구 말이 옳은 것인가?
구약 성경의 예언은 "인자"인 메시야가 이땅을 실제로 통치할 것이며, 지상 메시야 왕국에 대해서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단7:13:13-14, 2:34-35, 44-45; 렘23:5; 슥14:9).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 많은 사람들이 메시아의 오심을 기대하고 있었으며, 시므온과 안나는 성전에서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씀을 볼 수 있다(눅2:25-38). 우리는 또한 현자들이 동방에서 예루살렘으로 왔을 때 "유대인의 왕으로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신가?"라고 물었으며 그들은 예수님을 왕으로서 경배하였다(마2:1-11) 예수님은 왕으로서 태어나셨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다. 예수님께서 30세가 되시고 요단강에 침례인 요한에게 나타났을 때, "너희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3:2) 그리고 또한 우리는 그의 사역은 "주의 길을 예비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마3:3; 사40:3). 주의 길을 예비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이것은 "십자가"가 아니라 "왕국"이다. 요한의 메시지가 만일 그가 "천국"이 외적이며 보이는 이 땅의 왕국을 의미하지 않는다면 그의 메시지는 "메시아의 왕국"이 세워질 것을 기대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요한 자신이 제자들을 보내고 홀로 있었을 때 예수님께 질문한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다. "당신이 오실 그 분이시니이까? 아니면 우리가 또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리이까?"마11:3 이 메시아의 왕국의 "표적들"인 많은 치유의 이적들(사35:1-10)은 그리스도의 메시아의 사역의 증거이며, 요한의 제자들에게 한 대답은 사실로서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그들이 외쳤을 때 요한과 예수님은 지상의 메시아적 왕국의 의미로서 외치셨던 것이다. 천국(kingdom of heaven)이라 불리는 것은 천상의 영적인 왕국이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인간으로부터 기인된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에 의해 하늘로부터 기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편 침례인 요한이 그의 두 제자에게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양"(요1:29)으로서 가리킨 적이 있는데, 이것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의 시험"을 받으시고 침례를 받기 위해 요한에게 나타났을 때이다. 이것은 이전의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그의 외침의 성격을 바꾸거나 무효화할 수 없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시자 마자 "즉시" 마귀에게 시험을 받기 위해 광야로 들어가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마4:1-11, 막1:11-13), 또한 요한은 그의 제자들에게 침례 후 40일이 되기까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예수님을 가리키지 않았다. 이 "그 다음날"(요1:29)은 예수님의 침례 이후를 언급한 것이 아니라, 단지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요한에게 그리스도인지 엘리야인지를 물었을 때의 다음날이다(요1:19-28). 요한복음1:32-34절에서 요한은 그의 침례 전까지 예수님이 "하나님의 어린양"으로는 알지 못했기 때문에 증거하지 못했다. 그는 성령께서 비둘기 같이 내려와 그 위에 머무는 것을 보고 나서야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침례인 요한은 그리스도의 사역이 시작되었을 때 그분의 희생적 사역은 알지 못했으며 그가 천국이 가까이왔다라고 외쳤을 때에 한번도 영적인 왕국을 언급한 적이 없었다.
나다나엘의 대답은 "랍비여, 주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주는 이스라엘의 왕이시나이다!"(요1:49)였다. 예수님은 이 대답을 부인하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 사역에 임하셨을 때 침례인 요한과 마찬가지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하셨다(마4:17). 이 회개는 "민족적인 회개"를 말한다. 구약 성경에서 분명하게 민족적인 회개, 즉 이스라엘이 국가적으로 회개함이 없이는 메시아의 왕국을 세울 수 없음을 가르치고 있다. 마태복음4:23의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시며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또 '왕국 복음'을 전파하시며"에서 우리는 이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왕국 복음은 병을 고치는 표적이 수반되었다. 왕국복음은 한 개인의 혼의 구원과는 관계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메시지였다. 이 복음은 교회가 들림을 받은 후에 왕국이 세워지기 전에 "증인들"에 의해 다시 전파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왕국 복음"은 혼의 구원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단지 메시아의 왕국이 가까이 왔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12제자들을 보내셨을 때 {이방인들의 길로도 가지 말고, 또 사마리아인의 성읍에도 들어가지 말고 다만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가서 전할 때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말하고 병든 자를 고쳐주고 문둥병자를 깨끗케 하며 죽은 자들을 살리고 마귀들을 내어 쫓으라}(마10:5-8). 위와 같이 그들의 사역은 "왕국의 표적"을 수행하는 것이지 혼을 구원하는 것은 언급되지 않는다. 그들은 "구원의 복음"을 전하지 않았으며 단지 "왕국 복음"을 전하였을 뿐이다. 그리고 더욱이 "구원의 복음"은 전 세계에 전해지나 "왕국 복음"은 아무에게나 전해지는 것이 금지되고 오직 "이스라엘 집"에만 명령된 것을 볼 때, 오직 이스라엘 전파되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제자들이 눈에 보이는 지상 왕국이 세워질 것을 기대한 것으로써, 요한과 야고보가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예수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기를 간구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막10:35-41). 만일 이 땅에 왕국이 세워지지 않는다면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생각들을 깨뜨리셔야만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광의 자리는 예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주신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오히려 메시야 왕국에 대한 믿음을 확신시켜 주었다(마20:23).
"다섯 덩어리의 빵과 두 마리 고기"의 이적 후에 사람들은 주님을 억지로 왕으로 세우고 싶어했다는 사실을 통해 볼 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지상 메시야 왕국이 곧 도래할 것으로 믿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떠나 홀로 산으로 피하셨다. 이것은 눈에 보이는 이 땅의 왕국에 왕이 되는 것을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왕국은 잘못된 의도를 가진 백성들이나 사람들로 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로부터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단7:13-14). 예수님은 그의 외적이며 눈에 보이는 이 지상 왕국의 왕위를 거부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스카랴 9:9절의 예언대로 나귀를 타고 백성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사실에서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주님은 "호산나"라는 찬양을 받으셨다. 또한 "유대인의 왕"으로서 십자가에 못 박혔다(마27:37). 빌라도가 예수님께 질문인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하셨다. 유대인의 왕으로서, 또한 이것을 목적으로 태어나신 것도 인정하셨다. 하지만 현재 그의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고 하심으로써 그분의 왕국은 이 땅에 있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란 사실을 분명히 하셨다(요18:33-37).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렇게 질문할지도 모른다. "만일 유대인이 민족적으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왕으로 받아들였다면 지상의 메시아의 왕국은 세워졌을까요?" 대답은 "확실히 그렇다." 하지만 분명히 구약에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예언되어 있고 또한 이것들을 성취시켜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왕의 직무를 맡기 전에 민족의 구속이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로마 정부에 의해 예수님이 붙잡혀 강도와 같이 십자가에 못 박혀 부활과 승천하는 다니엘의 69주의 마지막 내용이 성취되고 또한 70주는 멈추지 않고 이 내용들을 성취시키면, 이 땅위에 재림하여 그분의 왕국을 세우셨을 것이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그럼 교회는 어떻게 되는가?" 라고 질문할 것이다. 만일 교회를 형성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가운데 있었다면(엡1:4) 다니엘의 69주와 70주는 사이에 아무런 공백이나 간격없이 교회가 형성될 수 있겠는가? 70주가 바로 시작된다면 이스라엘은 이미 지상 왕국을 건설하고 있다는 말이 되는데 뭔가 모순이 있지 않는가? 그러나, 이런 질문은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나온 상상에 불과한 질문일 뿐이다.
하나님의 시대에 따른 계획과 목적은 그분의 "미리 아심"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에 그런 모든 추측과 억측은 근거없는 걱정에 불과한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왕을 거부함으로써 왕국이 거부된 것을 미리 보시지 않으셨다면 그분은 이것을 현시대보다는 다른 시대에 교회를 형성하실 것을 계획하셨을 것이다. 교회는 귀중한 그리스도의 피로 값을 치르고 산 것으로서 (행20:28, 벧전1:18-21), 교회는 자기 백성에게 배척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힘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슥12:10). 스카랴는 예수님을 찌른 자들이 자신을 쳐다 볼 것이다 라고 미리 예언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미리 아심을 잘 알 수 있는 한가지 예는 유다가 배신할 것을 알고 계셨으나, 유다로 하여금 자신을 배신하도록 유도하거나 강요하지 않으셨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유대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거부하도록 하신 것은 아니다. 교회가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은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왕으로서 거부하여 "하나님의 계획" 안으로 들어오지 못할 것을 "선견"을 통해 미리 아셨을 뿐이다. 또한 교회가 완성되고 세상으로부터 들림받을 때까지 이스라엘의 민족적인 회개는 없을 것이다 .
성경을 해석할 때 어떤 부분도 지금 시대를 과거나 미래의 시대에 넣지 말아야 할 것이다. 즉 "지나간" 시대나 "오는" 시대는 "왕국"과 관계가 있지만 "지금" 시대는 교회와 관계가 있다. "왕국"은 외적이며 눈에 보이는 지상의 "정치적인 조직체"이며, 이 땅 위에 세워진다. 반면에 교회는 볼 수 없는 천상의 "영적인 유기체"이며, 이 땅 위에서 끌려 올라간다(살전4:16,17) 이 "왕국"은 "세상의 기초"가 놓인 이후에 준비되었다(마25:34) "교회"는 세상의 기초를 놓으시기 "이전에" 그 분 안에서 택하셨다. 그러므로 "교회"는 "왕국"이 아니다.
산상 설교
THE SERMON on THE MOUNT
산상설교에 있는 내용들을 상당한 주석들의 혼동으로 인해 미래의 시대에 속한것을 취하여 현재 시대에 적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마태복음5:1-7:29이 그러하다. 마태복음은 유대인을 위한 것이며 반드시 그렇게 해석되어야 한다. 물론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모든 것이 이루어질때까지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5:18); "또는 너희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 마음도 있느니라."(마6:21)과 처럼 어느 시대에나 적용할 수 있는 말씀도 있지만 그렇지 않는 말씀도 많이 있다. "금식"(6:16-18), "공회의 위험"(5:22), "심판", "재판관"이나 "제단"(5:24-25), 그리고 "나는 너희를 전혀 알지 못한다."라고 하신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런 말씀들은 모두 율법 밑에 있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 시대가 아닌 다른 시대에 적용해야만 한다. 우리는 무조건 적용함으로 인해 그들의 형제조차 사랑하지 못하면서도, 그들의 "원수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는 많은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을 흔히 볼수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그들의 형제들에게는 화해하려하지 않으려 하면서도, 그들의 대적하는 자와는 속히 화해하려한다. 지독하게 중독된 사람들에게 한 가지도 판단하지 않는다. 만일 누가 고소하여 웃옷을 뺏앗으려 한다면 외투까지도 주어야 하며, 이 법대로 해야 한다.
"너에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너에게 빌리고자 하는 자로부터 돌아서지 말라"라는 계명을 지켜보라. 가까운 교회에 가서 당신이 갖고 싶은 것들을 달라고 해보라. 만일 한 쪽뺨을 맞고 다른쪽 뺨을 돌려 될 사람이 있겠는가?
산상설교의 한 부분인 "주님의 기도"(마6:9-13)를 적용해보자. "왕국"이 임하옵시며, 이것은 교회의 확장이나 번영이 아니다. 이 안에는 죄로부터의 구원에 관한 기도가 없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이다". 라고만 구한다. 이것을 기도하는 사람들은 환란 기간을 살면서 왕이 오셔서, 왕국이 세워져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며 하늘에게 이루어진 것과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갈망한다. 이 때는 "짐승"(적그리스도)이 권세를 가지고 있으며, 짐승의 표를 받지 않으면 아무것도 사거나 팔수 없다. 따라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고 기도해야하며, 그들은 초자연적으로 양식을 제공받지 않는다면 굶어 죽을 것이다. 그리고 이 때는 실제적으로 악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악한 자(짐승을 경배하게하고 그들의 믿음을 저버리게 하려는 사탄)에게서 구원이 필요하게 된다.
그리스도가 말한 "산상설교"는 그분이 배척되기 전이므로, 왕국이 세워지기 위한 기초가 되는 것이다. 지금은 왕국은 힘으로 임하지 못하며, 오직 천년왕국에서 적용되어질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시대들을 서로 구분해야 하며 성경의 말씀을 아무 시대에나 끼어 맞추어서는 안된다.
제자들의 질문
THE DISCIPLES, QUESTION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후인 그분의 하늘에 오르시기 전에 눈에 보이는 왕국의 기대를 가지고 이렇게 질문한다.
{"주여, 이 때에 이스라엘 왕국을 다시 회복하시겠나이까?" 그분의 대답은 "너희에게는 그 때나 시기를 알게 하신 것이 아니요, 아버지의 자신의 권한에 두셨느니라."}(행1:6-7)
이것은 분명히 제자들은 영적인 것이 아닌, 지상의 눈에 보이는 왕국을 기다리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예수님께서는 간단하게 이 시대에 "영적인 왕국"을 세우려 오셨다면 제자들에게 떠나 아버지에게 다시 돌아가시려 하는 장엄한 순간에 그 당신 일반적이며 솔직한 질문에 대해, "왕국은 영적으로 세워질 것이며 이 땅위가 아니다"라고 상세하게 그들에게 설명해 주어 그들의 잘못된 기대와 생각을 깨우쳐 주어야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세워지는 때나 시기나 알 필요가 없다라고 말씀하신다.
누가복음19:11,12절을 읽어보면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더라. 이는 주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계시므로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 나타나는' 줄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라.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어떤 귀인이 왕국을 받아서 돌아오려고 먼 나라에 가게 되었더라}.
여기서 예수님은 먼 나라(하늘)에 가서 왕국을 받기 위해 떠난 "어떤 귀인"으로 비유되며, 그분은 왕국을 받으면 다시 오실것이다.
성경 어느 곳에도 현재 예수님이 왕이라는 것을 증명할 구절은 없다. 다윗은 기름을 부음받은 왕이었으며 사울이 죽고 왕이 될 것이 미리 예언되었지만 사울이 죽을 때까지 왕좌를 취하거나 왕이 되지 못했다. 따라서 에수님도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셨지만 그분은 실제적으로 보좌를 차지하시기 전에는 왕이 되지 못하신다. 현제 그분은 그분의 대제사장의 역활로서 일하시고 계신며, 그리고 그분 자신의 보좌가 아닌 아버지의 보좌에 앉아 계신다.
II. 왕국의 신비
The Kingdom in Mystery.
왕이 거부되지 않고서는 왕국이 세워지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왕국은 왕국의 신비라고 알려진 다른 면을 가지고 있다.
이 왕국의
"신비적인 형태"
는 "천국의 비유"로서 마태복음에만 기록되어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고 교회가 휴거되기전인 이 시대의 특징을 잘 알고 싶다면 우리는 이 비유들을 공부해야만 한다. 예수님께서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마치신후에 제자들이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라고 질문하자 예수님께서는 이는
"천국의 신비들"
이 너희에게는 알도록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허락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니라."고 하셨다.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는 35절에 나와있는데 선지자에게 예언된 것이 성취되기 위한 것이었다.
{내가 내 입을 열어 비유들로 말하고 내가 세상의 기초가 놓인 이래로 감추어진 것들을 말하리라.}
따라서 "천국의 비유"는 "메시아" 혹은 "천년왕국"을 묘사한 것이 아닌데, 이것들은 구약에서 "감추어진 것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영적인 왕국"에 관한 비유가 아니다. 왜냐하면 비유에 사용된 모든 말씀들이 이 세상의 자연물을 그대로 사용하셨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현 시대의 특징들을 다루었으며, 왕이 없는 동안 현 시대의 모습을 잘 드러내 보여준다.
주님께서 사용하신 비유는 단순한 가공의 우화가 아니다. 인간들은 진실이 아닌 것들을 우화로 드러내지만, 주님의 모든 비유는 "진실"을 나타내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주님께서 비유를 사용하신 까닭은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말씀을 성취하는 것이다(사6:9-11.마13:13-17). "이는 이방인들의 충만함이 차기까지는 이스라엘의 일부가 완고하게 된 것이라."(롬11:25) "천국"의 일곱가지 비유는 마태복음 13장에서 볼수 있다. 모두 12가지이며,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제외하고는 "천국은 . . .와 같으니"로 시작된다.
1. 씨 뿌리는 자
"씨뿌리는 자의 비유의 목적"은 천국의 성격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복음을 듣는 사람들이 어떻게 성장하고, 자라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이 비유에는 말씀을 듣는 4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나온다.
(1) 길 가
여기서 씨는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마귀인 새"(19절), "비평주의", "의심", "믿지 않음", "선입견", "무관심" 등등으로 흙에서 자라기 전에 씨를 잡아 채간다.
(2) 돌짝밭
이곳의 씨는 흙이 얕으므로 뿌리가 자리가 전에 죽는다. 감정적인 혼은 몇가지 놀랄만한 지옥의 공포나, 약간의 강한 호소에 움직여 회심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고난이 계속되면 이들은 곧 실족하게 된다.
예수님께서도 돌짝밭의 마음을 가진 사람의 흙밑에는 "환란과 박해"라는 돌이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3) 가시떨기 사이
이곳에서의 씨는 "뿌리"가 있고 "자라났다" 하지만 열매를 맺지 못한다. 가시밭 같은 마음의 땅은 가시떨기와 뿌리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것이 씨가 필요로 하는 양분을 흡수하며 그늘지게 한다. 마태복음에서 이 "가시떨기"는 "세상 염려"와 "재물의 미혹"으로 마가복음4:19에는 "다른 일들에 대한 욕심" 그리고 누가복음8:14에는 "쾌락"으로 언급된다.
(4) 좋은 땅
이곳에서는 "뿌리"가 나고 "자라나고" 또한 "열매"를 맺으나 양이 다르다. 어떤 것은 100배로, 어떤 것은 60배로, 어떤것들은 다지 30배로 맺는다. 왜 그런가? 이것은 흙이 잘못되어 그런것이 아니다. 이땅은 길가나, 돌이나, 가시떨기도 아닌 좋은 땅이다. 그렇다면 왜 소출에 차이가 생기는가? 문제는 경작의 방법상의 차이 때문이다. 깊이 땅을 갈고, 물을 주고, 적절한 기온이 유지된다면 100배의 열매를 맺을 것이다.
이 비유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인들에게 새로운 것을 가르쳐준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 알아서 자라는 잡초와 같은 것이 아니라, 밀과 같이 뿌려지고 경작되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이 상징은 왕이 왕국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농부가 씨를 뿌리는 것이다. 땅에서는 열매가 보이지 않으며, 오직 4분의 1정도만이 동일하지 않은 양으로 열매를 맺는다. 이 시대에서는 비교적 복음이 실패한것으로 보인다. 하여간 분명한 것은 이 비유들은 이 시대에 복음이 전파되어 이 세상이 변화된다고 가르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2. 밀과 독보리
"밀과 독보리"의 비유는 (마13:24-30) 그리스도께서 해석해주시며(37-43절), 이것은 어떤 상상이나 비성경적인 해석을 금하고 있다. 그분은 우리에게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은 "인자"이며(37절), 그는 "자기의 밭"에 씨를 뿌리며(24절),"밭"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이다. 이것은 "밭"은 교회이며, "밀"과 "독보리"는 "진리"와 "거짓"을 나타낸다는 신학자들의 주장을 단 일격으로 무너뜨린다.
처음 비유에서 인자인 "씨뿌리는 자"는 "세상"에 씨를 뿌린다. 이 비유에서 "사람"(왕국의 자녀들)에게 씨를 뿌린다. 이것은 후에 박해로 인해 스테판이 순교당할 때 아름답게 설명해주고 있다.행8:1-4 인자는 사탄이 아닌 타시스의 사울을 통하여 교회를 유다와 사마리아의 도처에 흩으셨다. 이것은 비유의 시작이다. 흩어버림으로써 복음을 들은 유대 교회의 교인들은 각 나라들로 계속 퍼져나갔다.
그러나 "밭"은 밀만 뿌려진 것이 아니라, 마귀가 와서 독보리도 뿌렸다. "독보리"는 밀과 거의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에 이것들이 완전히 자랄 때까지는 진짜를 구분할수 없다. 독보리를 뿌려진 것은 씨뿌리는 자가 졸거나 잠을 잘 때가 아니다. 성경에서 씨뿌리던 자가 잠을 잤다는 말씀이 없다. 씨부리는 자가 들판을 보러 자리를 비운 사이 사람들이 잤던 것이다. 그 때 마귀가 와서 곡식들 사이에 독보리를 뿌렸던 것이다(25을 볼 것) 뿌린 씨는 여전히 자라나고 있다. "독보리"는 "악한 자의 자녀들"이라고 불리는데 그들은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나서"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이러한 유대인들의 특징을 가진 자들이다(요8:44).
여기서 주목할 것은 마귀는 "밀"을 바꿀수 없다는 점이다. 그는 단지 "독보리"를 뿌려 그 독보리를 통해 전 들판의 모습을 완전히 바꾸어 놓으려는 것이다. 종들이 들판을 보았을 때는 이미 들에는 독보리가 자라나고 있었다. 하지만, 주인은 "추수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두었다가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여 먼저 독보리를 모아서 불사르기 위하여 단으로 묶고 곡식은 내 곡식 창고로 모아 들이게 하리라." 이 비유 또한 교회에 적용되는 비유가 아니다. 이 시대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악을 완전히 뿌리뽑아 버리고 싶은 소원이 있겠지만 그것은 단지 꿈에 불과하다. 이 시대에는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선이 널리 퍼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선"과 "악"이 함께 병존하며 오히려 마지막 시대까지 더욱 악해져 가고 있다. 이 비유에서 언급되는 "밀과 독보리"가 추수때에 함께 거두어 들인다는 사실은 이런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 준다.
"선"과 "악"의 투쟁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추수"때까지이다. 추수때는 언제인가? 그것은 바로 이 세대의 마지막 때이다. 이 세대의 마지막 때에 나타날 추수꾼들은 "천사들"(39절)이다. "교회라는 밀이 익을 때", 즉 충만함에 이르면 바로 주님께서 오셔서 데려 가실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30절을 읽으면서 상당히 당황해 한다.
{추수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두었다가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여 먼저 "독보리"를 모아서 불사르기 위하여 단으로 묶고 "곡식"은 내 곡식 창고로 모아들이게 하리라}.
이 말씀을 읽으면서 "독보리가 탈때까지 교회는 이 땅에 남아 있게 되므로, 교회는 환란을 통과할 것이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독보리는 밀을 수확하기 전에 태우기 위해 단으로 묶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분리해서 밀을 하늘의 창고에 들이고 나서 태울 준비를 하기 위해 단으로 묶는 것이다. 독보리가 불사라지고 나서야 밀을 수확해서 곡식 창고에 들인다는 잘못된 종교적 가르침 때문에 교회가 환란을 통과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곳은 "크리스챤 사이언스", "몰몬교", "영성화 운동", "신사고"(New thought), "신지학"(theothophy)등등이다. 이 시대가 끝날 때까지 독보리와 밀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결국 그리스도께서 천년왕국을 건설하러 이 땅에 다시 오셔야만 이 둘과의 분리가 이루어 질 것이다.
3. 겨자씨 비유
겨자 씨 비유에 이어 바로 누룩의 비유가 나온다. 이 비유들은 똑같이 "천국은...와 같으니라" 하신 말씀으로 시작된다. 그러므로, 이 비유들도 다른 천국에 관한 비유와 틀린 점이 있을 수 없다. 모두 "천국"에 관한 같은 말씀이기 때문이다. 흔히 사람들은 "이 두 비유"가 교회의 팽창이나 확산에 적용한다. 복음이 전 우주적으로 전파될 것을 비유한 말씀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기서 다시한번 강조하거니와, 천국은 결코 교회가 아니다. 차라리 이 말씀을 세상에 있는 기독교계(Christiandom)에 비유하면 조금은 나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 두 비유를 교회에다 적용한다면, 겨자 씨의 비유는 외적으로 팽창하는 교인들의 증가와 교회 수를 말하고, 누룩은 내적으로 성장하는 교인들의 영적 성숙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본문을 잘 보라.
겨자씨는 아주 작은 씨지만 정원에 심겨지면 7-8m 가량 자란다. 가장 좋은 수확을 거두기 위해서는 마땅히 정원에 심겨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들판"(자기 밭)에 겨자 씨를 뿌렸다고 한다. 비유를 통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은 "들판"은 세상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 겨자씨는 자라서 풀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나무라고 씌여져 있는 점으로 보아 식용이나 부드럽게 자란 것이 아니라 야생에서 억새게 자랐음을 알 수 있다. 이 겨자씨는 그 종류에 따라 알맞은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마귀를 상징하는 공중의 새들의 날아와서 거기에 거처를 삼는다. 이 새들은 누구인가? 이 또한 기록된 말씀의 비유를 통해, 길가에 뿌려진 씨를 먹어버리는 마귀들임을 알 수 있다(마13:4,9). 그렇다면 이 비유에서 새는 "회심한 신자"나 "교회에 새로온 신자"가 아니라 사탄의 종인 마귀들임이 분명하다. 기독교계에 비유해서 겨자씨의 말씀을 적용해 보자.
"겨자씨"는 오순절에 성령을 받고 침례를 받은 120명의 성도들로 시작되었다. 이 씨는 계속 자라나서 로마를 국교화 시킬만큼 자라났다. 그러나, "공중의 새들"이 날아와서 나무에 둥지를 틀고 더럽혔다. 예를들어, 아나니아, 삽비라, 마술사 시몬, 후메내오와 필레투스 같은 사람을 들 수 있을 것이다. A.D 324년 콘스탄틴은 교회와 국가를 하나로 일치시켜 버렸다. 이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었고, 정치를 하기 위해서 교회에 들어왔다. 자! 이 비유가 맞다고 생각하는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어딘가 비정상적이라고 스스로 느낄 것이다.
천국의 비유에서 겨자씨는 이 세상에 뿌리박고 있으면서, 기독교의 이름을 내걸고 부와 지위와 권력을 획책하는
"거대한 세상 제도"
를 말한다. 그는 이 시대의 어두움의 통치자의 대리자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를 아는 지식"을 온땅에 물같이 덮으실 飁까지, 바로 주님이 이 땅에 재림하실 때까지 순수한 기독교가 이 세상에 널리 전파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흔히 잘못해석하고 있는 이 비유의 본 뜻을 더욱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인자가 올 때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 볼 수 있겠느냐?"(눅18:8)
4. 누룩의 비유
누룩의 비유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다. 여자는 교회를 나타내며, 누룩은 복음이요, 밀 세말은 인류이다. "복음의 누룩"이 교회에 의해서 세상에 소개될 때 세상은 충분히 부풀어 올라서 완전히 변화되어 모든 사람들은 복음으로 변화받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누룩"은 절대로 "복음"을 나타낼 수 없다. 성경에서 누룩은
"악의 상징"이다.
누룩은 음식물을 발효시켜서 부패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룩이 들어가면 어떤 음식물이라도 상하게 된다. 이스라엘은 유월절을 기념하기 위해 칠일간을 누룩없는 빵을 먹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스라엘에서 끊어지게 된다(출12:15). 어떤 희생제물에도 누룩을 넣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출34:25. 레2:11,10:12). 그리스도께서는 이 비유외에도 3번이나 누룩에 관한 비유를 사용하셨다. "바리새인의 누룩", "사두개인의 누룩", "헤롯의 누룩"에 대해서 말씀하셨다(마16:6-12, 막8:15).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은 "거짓 교리"이다. 바리새인의 거짓 교리는 주로 "율법주의"였다. 그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이 전혀 없었다. 사두개인의 거짓 교리는 "회의주의"였다. 사두개인들은 몸의 부활을 믿지 않았고 천사나 영이 없다고 주장했다. 헤롯의 거짓 교리는 "물질주의"였다. 그는 세상과 종교를 혼합해서 이용해 먹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악하다는 의미를 제외하고는 "누룩"이란 표현을 쓰신 적이 없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묵은 누룩은 떼어내 버리라. 그래야 너희가 누룩을 넣지 않은 새반죽이 되리라."(고전5:6-8). 바울은 누룩을 "악하고 가증한 누룩"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누룩없는 성실과 진리의 빵"과 멋진 대조를 이루고 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와 갈라디아 교회에 "적은 누룩이 온 반죽을 부풀게" 한다고 엄히 경고하고 있다(고전5:6, 갈5:9).
누룩에 대한 이런 일반적인 원리에도 두가지 예외가 있다. 레위기23:6-14에서 우리는 "첫 얼매들"의 "흔드는 제사" 에는 절대로 "누룩"이 들어가서는 안되다는 것을 볼 수있다. 이는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으로써 부활 때에 첫열매들은 "죄"와 전혀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위기23:15-17에 나오는 새로운 "음식 제사"를 드릴 때는 "누룩"을 넣어서 빵을 구워야 한다. 이는 부활한 후 50일 뒤에 드려지는 제사이다. 이것은 부활하신 후 50일이 지난 후 오순절에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한다. 이 때 제자들은 모두 죄인들이었기 때문이다(행2:1-4). 성령을 받은 제자들도 아직 몸의 구속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구원받은 죄인인 것이다.
또 하나의 예외는 아모스4:4,5에 나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범죄를 꾸짖으며, 누룩과 함께 감사의 희생제물"을 드리라고 조소하고 계신다. 우리는 여기서 누룩을 사용하는 것이 그들의 잘못을 바로 깨닫게 하시기 위해 허용하신 뜻 가운데 행해져야 할 명령임을 볼 수있다. 여기서도 "누룩"은 여전히 악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이와같은 사실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 볼 때, 누룩의 비유에서 누룩은 거짓된, 또는 부패한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다.
만약 누룩이 복음을 가르치는 것이라면, 우리는 참으로 기묘한 모순에 빠지게 된다. 복음은 누룩과 같이 역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룩은 일단 빵안에 들어가면 저절로 빵 전체로 퍼지는 것이다. 하지만 복음은 그런 식으로 퍼지지 않는다. 만약 복음이 누룩과 같이 퍼지는 것이라면, 한 마을에 복음을 전파해 두기만 하면 그마을은 저절로 모두 복음화 되고, 곧 도시와 국가가 모두 복음화 되어 버릴 것이다. 그러나, 어디 한 번 보라. 우리 주위에서 그런 곳이 있는가? 복음은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다. 만약 복음이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라면, 복음은 실패한 것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우리는 누룩의 성격에 대해서 무지한 사람들이 아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이 건전한 교리를 견디지 못하고, 그들 자신의 정욕에 따라 가려운 귀를 즐겁게 해줄 선생들을 많이 두리라. 또한 그들이 그들의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로 되리라}(딤전4:3-4).
사도 베드로도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그러나 백성가운데도거짓 선지자들이 있었던 것처럼 너희 가운데도 거짓 교사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저주받을 이단들을 비밀리에 불러들여서 자기들을 사신 주마저 부인하며 급격한 파멸을 스스로 불러들이느니라. 또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파멸의 길을 따르리니 그들로 인하여 진리의 길이 비방을 받을 것이라}"(벧전2:1-2).
누룩에 대해서 좀더 연구해 보자. "가루 서말에 넣은 누룩"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어디서 우리는 가루를 구하는가? 가루는 절대 독보리에서 얻을 수 없다. 가루 전체를 부풀게 하는 것은 독보리가 아니다. 가루는 밀에서 얻어진다. 그러므로 가루가 가리키는 것은 "거듭나지 못한 인류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가루 서말은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고 자처하는 교회들이다. 이들은 로마 캐톨릭, 희랍정교, 개신교로 크게 세가지로 나눌 수 있다. 이 가루 서말에 "십자가 숭배", "죽은 자를 위한 기도", "침례에 의한 중생" 등의 거짓 교리가 들어가서 모든 가루들을 부풀게 하고 있다.
누룩을 숨긴 여인은 계시록에 나오는 두아티라 교회(계2:20)의 음녀 이세벨과 정확히 일치한다. 주님은 로마 캐톨릭을 일컬어 계시록 17:5절에서 "땅의 창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고 밝혀 놓으셨다. 누룩이 나쁜 것이고, 타락하게 한다는 사실은 그 여인이 그것을 몰래 숨겨 넣는다는 사실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만약 누룩이 복음이라고 한다면, 여인이 그것을 숨겨 넣을 필요가 전혀 없다.
이 네가지 경고는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서 복음을 전파할 때 생기는 결과를 정확하게 경고해 주고 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면서 발생하는 실패들과 교회의 타락에 대해서 정확하게 이해하고 예측해야 한다. 우리는 그 문제로 낙담하거나 실망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비유를 통해서 주님이 이 땅에서 떠나 계시는 동안 전 세계적으로 복음이 수용된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세상은 복음을 거부하고 마귀와 자신의 육체를 따라 살 것이기 때문이다. 사탄은 이 시대가 끝날 때까지 이 세상의 신이요 공중 권세 잡은 자이다. 교회는 깨어있지 못하고 사탄에게 농락을 당하며, 깊은 잠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사탄은 교회에 다니면서, 단지 입으로만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을 통해 교리를 파괴하고, 선한 행실을 부패시킬 것이다. 주님이 오실 때까지 사탄의 이런 활동은 계속될 것이다. 주님께서 불로써 심판하실 때까지 누룩은 점점 더 퍼져서 모든 것을 부패시키고 말 것이다. 누룩의 비유는 바로 이 시대의 모든 종교주의에 물든 기독교의 산물인 것이다.
5. 숨겨진 보화
"밭에 숨겨진 보화"와 "진주"에 대한 비유는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해석해 왔다. 즉 보화나 진주는 그리스도며, 따라서 우리는 모든 것을 팔아서 그분을 사야 한다. 우리는 자신을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완전히 뒤엎는 해석이다. 특별히 주님의 이 시대를 향한 구원 계획과는 완전히 배치된다.
이 비유에서 "밭"은 "세상"이다. 이미 "독보리"의 비유에서 배운 바 있다. "죄인"은 세상을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포기해야 한다. 죄인은 세상에서 팔아야 할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스도는 돈으로 사고 팔 수 있는 분이 아니다. 주님은 세상에 감추어진 분도 아니며, 세상에서 찾는다고 해서 찾을 수 있는 분도 아니다. 구원은 살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구원은 은혜로 얻어지는 선물이다(롬6:23). 죄인이 그리스도를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사신다(고전6:20). 구원은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며, 영접하기만 하면 된다(요1:12). 구원을 얻는데는 돈없이, 값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이다(사55:1).
우리는 이미 앞에서 들은 세상이요, 사람은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임을 배웠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사신다. 주님께서 왜 세상을 값주고 사시는 것일까? 세상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 아닌가? 주님이 들에서 보화를 발견한다면 왜 들을 살 때까지 그것을 다시 숨겨야 하는가? 세상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누군가 밭에 금, 은, 철, 구리와 같은 광물질이 들어 있다면, 그는 그 밭을 낮은 값에 사기 위해 주인을 속일 것이다. 어떤 정직한 사람이 밭에 이런 보화가 있는 것을 알고 그것이 안전할 때까지 주인을 속인다면, 그것은 마귀적이요, 정욕적인 행위가 아닌가? 이런 일은 마귀에게나 적당한 일일 것이다. 사탄은 이 밭을 강탈하려 할 것이다. 숨겨져 있던 보화는 그가 밭을 샀을 때 이미 없어졌을 것이다. 그 보화는 그 자리에 두어서는 안된다. 다른 곳에 두어야 한다. 그것은 마귀가 소유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마귀가 들판에서 보화를 캐내어 가지 못하도록 다시 숨겨 놓으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보화를 발견하시고, 그것을 얻기 위해 그 밭을 사셔야 했다. 주님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지불하셔서 그 밭을 사셨다(고후8:9).
숨겨진 보물은 이스라엘이다.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이제 만일 너희가 참으로 내 음성에 복종하고 나의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백성보다 나에게 특별한(peculiar) 보물이 되리니 이는 온 땅(세상)이 내 것임이라}(출19:5).
{이는 주께서 야곱을 자신의 것으로 택하셨고 이스라엘을 특별한(peculiar) 보물로 택하셨음이라}(시135:4).
보물은 아직도 세상에 숨겨져 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들을 사셨다. 그러나 주님은 아직 그것을 소유하시지 못하셨다. 주님이 이 땅에 값주고 사신 그 "소유를 구속하실 때"까지 그것을 소유하지 못하실 것이다(엡1:14).
그 때까지 이스라엘은 열방들 가운데 숨겨져 있다. 이것은 "천국의 신비"이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현명하다고 자만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이방인들의 충만함이 차기까지는 이스라엘의 일부가 완고하게 된 것이라}(롬11:25).
이스라엘은 이방인들의 충만함이 찰 때까지 들에 숨겨져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숨겨 놓은 보물"인 이스라엘을 구속하실 것이다. 이스라엘은 "국가적으로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한 후 자신들의 땅인 이스라엘로 돌아올 것이다.
6. 진 주
진주의 비유에서 부유한 상인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진주는 교회이다. 숨겨진 보물의 비유에서 값을 주고 산 것은 보화가 아니라 밭이었다. 이 비유에서 값을 주고 산 것은 진주이다. 그리스도께서 진주를 모두 다 사시면, 그 진주를 다시 시장에 내어 파는 일은 없다. 주님은 진주를 자신의 영원하 소유로 삼으신다. 우리는 이 비유로부터 이 시대의 목적은 세상을 변화시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지키는데 있음을 알 수 있다.
7. 그물 속의 고기
이 비유는 이미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 시대를 다루고 있다. 여기에서 언급되고 있는 "그물"은 "복음의 그물"을 의미한다. 이 비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하신 말씀가운데 더욱 잘 드러나고 있다.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복음이 전파되고 있는 이 시대에는 한 사람, 한 사람씩 구원받고 있다. 이 비유는 이 시대에서 복음의 그물을 드리움으로써 사람들을 교회로 이끌어 오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그물 안에는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가 공존하고 있다. 어부들은 나쁜 고기를 좋은 고기로부터 분리해야 한다. 먹을 수 있고, 시장에서 팔 수 있는 고기는 그렇지 않는 고기와 같이 섞어 둘 수 없다. 교회가 늘 이 일을 완벽하게 처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비유의 끝과 독보리의 비유의 끝과는 서로 일치한다. 수확하는 시기는 "시대의 끝"이다. 이 시대의 끝이 되어야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를 나누신다. 이 일은 천사들에 의해 수행될 것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항은 독보리가 먼저 모아진다는 점이다. 하지만 밀이 하늘의 창고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독보리는 불에 태워지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나쁜 고기가 가려져서 버려지기 전에 좋은 고기는 하늘의 창고로 모아진다.
그물이 바다속으로 던져지고, 그물에 고기가 가득차더라도 바다 속에 있는 많은 고기는 여전히 잡지 못한다. 이 비유에 따르면 잡은 고기에 한해서만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를 나눈다. 결국 구원받는 사람은 극히 적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우리가 살고 있는 복음의 경륜에서, 비유가 가르쳐 주는 바와 같이 세상은 완전히 변화되지 않는다. 의인과 불의한 자들을 구분하는 것은 주님께서 재림하셔야 이루어 질 일이다.
이제 남은 다섯 개의 천국의 비유에 관한 내용은 비교적 간략하게 다루고자 한다. "자비심이 없는 종"의 비유(마18:23-25)는 천국에 갈 지체들이 서로간에 해야 할 행위와 관련되어 있다.
"포도원 지기"의 비유(마20:1-6)에서 노동의 삯으로 받은 한 데나리온은 구원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은혜의 선물이지 삯이 아니기 때문이다. 혹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아침 일찍 고용된 사람, 세시, 여섯시, 아홉시, 열한시에 고용된 사람들은 각기 다른 시대에 주님께 나아온 죄인들을 나타내는 것도 아니다. 성경은 다음 시대에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똑같은 삯을 받고 있음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비유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문맥을 통해 볼 때, 이 비유는 돈을 받고 일하는 고용인의 정신과 같은 자세에 대한 책망임을 알 수 있다(마19:27-3). 사람들이 복음 사역을 할 때, 어떤 마음가짐과 동기로 하였는지에 대해서 판단받게 될 것이다. 그 사람이 일한 양이 얼마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하였는가가 중요하다. 이 시대에서 일한 사람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서 자신이 일한 것이 무엇인지, 그가 나무나 짚이나 그루터기로 지었는가를 드러 날 것이다(고전3:9-15).
"결혼 잔치"(마22:1-14)의 비유는 누가복음 14:16-24에 기록된 "성대한 저녁 식사"의 비유와 혼돈해서는 안된다. "성대한 저녁 식사의 비유"는 주님께서 돌아가시기 석달 전 어떤 바리새인의 집에서 행한 말씀이다. 주님은 자신이 죽고 나서 부활하실 것에 대한 강력한 암시를 주셨으며, 이후에 펼쳐질 복음의 사역에 대한 암시를 이 비유에서 충분히 드러내 보이셨다. "결혼 잔치의 비유"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하시기 전인 화요일 아침에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많은 무리들에게 한 말씀이다. 주님이 하신 비유중에 "결혼 잔치의 비유"는 가장 광범위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이 비유에는 "모세의 율법을 받은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어린 양의 혼인잔치"까지 포함한다. "어떤 왕"은 하나님이시다.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첫 번볁 내려진 명령은 유대인들에게이다. 모세를 비롯한 선지자들은 "혼인잔치"를 선포한다. 침례인 요한과 열두사도와 칠십명의 제자들도 유대인들에게 천국이 가까웠음을 선포하면서 이 사실을 전파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갈보리에서 죽으셨을 때, 결혼 잔치를 할 수 있는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다. 하지만 유대인들을 이 초청에 응하지 않았고 베드로를 포함한 많은 종들이 마을로 보내졌다. 이것이 두 번째 부름이었다(행3:19-21). 하지만 유대인들은 이것을 아주 경히 여겼다. 스테판이나 야고보를 비롯한 남은 자들에게 마음대로 대하였고, 결국은 살해했다. 왕이신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셔서 자신의 군대를 보내셔서 이 도시를 불로 태우셨다. 이 일은 A.D. 70년 로마의 장군 타이투스(Titus)에 의해 이루어졌다. 바울과 바나바를 비롯한 많은 주의 종들이 결혼 잔치의 초청에 기꺼이 응하고자 하는 이방인들에게 보내졌다. 이 일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이 비유를 통해 볼 때, 초청받은 손님들 가운데도 서로 다른 부류가 있음을 볼 수있다. "혼인 예복"을 입지 않고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은 책망을 받고 쫓겨난다. 이 비유의 끝과 "열처녀의 비유"의 끝과 유사함을 알 수있다. 현명한 다섯 처녀와 어리석은 다섯 처녀가 분리되는 것처럼 입으로만 신앙을 고백하는 가짜 그리스도인들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쫓겨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열처녀의 비유(마25:1-13)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성도들을 모으실 때, 겉으로만 그리스도인 행세를 했던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 날 것인가에 대한 묘사이다. 우리는 교회내에서 누가 진짜 그리스도인이고, 누가 가짜 그리스도인인지 구별해 내지 못한다. 하지만 주님께서 오셔서 참과 거짓을 모두 성별하신다. 누가 참으로 성령의 소유인지는 그때 다 밝혀지게 된다. 만약 교회의 반이 가짜라면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혼인식에 참석하지 못하고 그들 앞에서 문이 닫히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어떤 비유에서도 우리는 세상이 복음으로 변화된다는 말씀을 찾아 볼 수 없다.
"달란트의 비유"(마25:14-30)와 누가복음 19:11-27에 나오는 "므나의 비유"를 혼돈해서는 안된다. "인자"는 그리스도이시다. "먼나라"는 천국이다. "떠났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승천을 말한다. "돌아온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말한다.
므나의 비유에서 한 므나를 가진 사람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 그가 가진 것을 빼앗기고 그가 받을 한 고을 다스릴 권세마저 빼앗기지만 쫓겨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달란트의 비유"에서 한 달란트를 가진 사람은 쫓겨난다. 이 비유의 주제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주의 사역을 섬길 것인가이다. 한 므나를 받은 사람은 주인을 엄격한 사람으로 알았고, 일을 하지 않았다. 그가 한 일이라고는 손수건에 싸서 감추어 두었던 것 뿐이다. 모든 비유에서 보듯이 주님이 오실 때, 밀과 독보리, 좋은고기와 나쁜 고기, 현명한 처녀와 어리 석은 처녀, 주의 사역에 신실한 종과 그렇지 못한 사람사이에는 분리가 있는 것이다. 주님은 그들이 행한대로 상을 주시고 보응하실 것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 "천국"이란 장을 보기 바란다.
III. 왕국의 모습
The Kingdom in Manifestation.
사탄이 결박당하고 그리스도께서 이 땅위에서 통치하시는 기간이 1000년이란 사실은 신약에서 너무나 분명히 기술하고다. 1000년이란 말은 계시록20:1-7에서 6번이나 나온다. 일반적으로 이것을 우리는
"천년(Millennium)"
이라고 부르는데 이 말은 라틴어로 "Mille(1000)"과"Annum"(년)의 합성어이다. 천년왕국이란 천이란 단어인 Millennium과 왕국이란 뜻의 kingdom이 결합한 말이지만 일반적으로 Millennium이라고 부른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실 때, "아버지의 왕국이 임하옵시며"라고 하셨다. 우리는 여기서 "천년"이란 말은 빼고 단지 "왕국"이란 주제에 대해서만 다루어 보자. "이방인"이란 장에서 이미 배웠듯이 4개의 대제국이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은 돌왕국이 나타나서 모든 나라들을 부수어 버리고 "영원한 왕국"을 건설한다.
"돌왕국"
Stone Kingdom
앞서 말했듯이 네 왕국이 역사속에 등장했던 문자적인 왕국이었으므로, 앞으로 있게 될 "돌 왕국" 또한 문자적인 왕국일 것이다. 이 왕국은 세상의 모든 왕국들을 멸하고 온 땅을 가득 채울 것이다. 이 왕국을 우리는 흔히 "천년 왕국"이라 부른다. 이 왕국이 세워질 시기는 계시록에 나오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재림하실 때이다. 주님께서 하늘의 군대를 이끌고 적그리스도를 멸하신 후(계19:11-21) 민족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인자가 그의 영광 중에 오고, 또 모든 거룩한 천사들이 그와 함께 오면 그 때에 그가
"그의 영광의 보좌"
'Throne of His Glory
에 앉으리니 그 앞에 모든 민족들을 모아 놓고 마치 목자가 양들을 염소들에서 갈라 놓듯이 그들을 따로 갈라놓으리라. 그리하여 양들(양의 민족들)은 그의 오른편에, 염소들(염소의 민족들)은 그의 왼편에 세워 두고 왕이 그의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오라, 내 아버지의 복을 받은 자들아, 세상의 기초가 놓인 이래로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그 왕국을 이어받으라'}(마25:31-34).
이 왕국은 이 지상에 세워질 왕국이요, 눈에 보이며, 물질적이며 정치적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통치할 왕국이다.
1. 정부의 형태
이 왕국은 "신정(神政)통치 체제"이다. 하나님께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나라를 직접 통치하신다.
{그 천사가 그녀에게 말하기를 "마리아야, 두려워 말라. 이는 네가 하나님의 은총을 받았음이니라. 보라, 네가 너의 태 안에 임신하여(shalt) 한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shalt). 그는 위대하게 될 것이며(shall),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라 불리울 것이요(shall), 또 주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의 조상 다윗의 보좌를 주실 것이며 그는 야곱의 집안을 영원히 통치할 것이요(shall) 그의 왕국은 무궁하리라(shall)."고 하니라}(눅1:30-33).
여기서 하나님은 "할 것이요"(shall)란 의지의 표현을 일곱 번이나 하셨다. 그중에 4가지는 이미 성취되었다. 마리아가 "한 아들"을 낳았으며, 그의 이름을 "예수"라고 불렀고, 그는 "위대"하게 되었으며,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라 불리웠다. 그러나, 아직 나머지 3가지는 성취되어야 할 것들이다.
다니엘은 이렇게 예언했다.
{내가 밤에 환상들을 보았더니, 보라, 인자 같은 분이 하늘의 구름들과 함께 오셔서 "옛날부터 계신 분"(하나님)에게 오시니 그들이 인자 같은 분을 그 분 앞에 안내하였더라. 거기에서 그 분께 다스림과 영광과 왕국이 주어졌으니, 이는 모든 백성과 민족들과 언어들이 그 분을 섬기게 하려 함이더라. 그 분의 다스림은 사라지지 않을 영원한 다스림이며 그 분의 왕국은 멸망하지 않으리라}(단7:13-14).
이 구절만 보아서는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의 보좌에 앉으셔서 친히 다스리실 것인지 다른 사람을 통해서 다스리실 것인지는 분명히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러나, 이와 연관된 다른 구절들을 비교해 보면 이 부문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성경의 몇몇 절에서는 다윗 왕이 다시 등극할 것이며, 보좌에 앉게 될 것이란 예언이 나온다.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그를 구할 것이다. 그러므로 새 왕은 다윗이란 이름으로 불리워질 것이다.
{그 후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돌아와서 주 그들의 하나님과 그들의 왕 다윗을 찾아서 훗날들에 주와 그의 선하심을 두려워할 것임이라}(호3:5).
{오히려 그들로 주 그들의 하나님과 내가 그들에게 일으킨 그들의 왕 다윗을 섬기게 하리라}(렘30:9).
{내 종 다윗이 그들 위에 왕이 될 것이며, 그들 모두에게는 한 목자가 있으리라. 그들은 또한 나의 명령대로 행하고 나의 규례들을 준수하며 그것들을 행하리라}(겔37:24).
{내 종 다윗은 영원히 그들의 통치자가 되리라}(겔37:25).
"만군의 주"께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그리고 장로들 앞에서 영광스럽게 통치하실 때(사24:23), 다윗왕이 잠깐 동안 섭정으로 다스릴 가능성이 있다. 할례를 받은 유대인들은 다윗을 왕으로 수용할 것이다. 에스겔 45:22을 보면 통치자가 불완전한 사람임을 알 수있다. "그 날에 통치자는 자신과 그 땅의 모든 백성을 위한 속죄제물로 수송아지 한 마리를 준비할 지니라"(겔45:22).
우리는 므나의 비유를 통해서 정부의 형태를 조금 엿볼 수 있다. 므나의 비유는 주님께서 왕국을 받아 오실 때, 자신들의 종인 유대인들에게 어떻게 대할 것인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열므나를 가졌던 사람은 열 고을을 다스릴 권세를 받는다. 다섯 므나를 받았던 사람은 다섯 고을을 다스릴 권세를 부여 받는다. 그의 므나를 활용하지 않고 단지 보자기에 싸서 숨겨 두었던 사람은 아무런 권세를 받지 못한다(눅19:11-26).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한 약속을 살펴보자.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를 따르는 너희들은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새세대(regeneration)에,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마19:28).
이 약속은 천년왕국에서 다스릴 권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불로 세상이 소멸한 후 새 하늘과 새 땅의 완전한 시대에 얻을 권세를 가르키고 있음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친히 "새세대"(regeneration)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새세대"라는 말은 현재의 지구가 재 창조되고 완전히 새롭게 된 때를 말하는 것이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전 세대를 보았지만 그들이 모든 것을 이해한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은 천년왕국에 관한 예언이며, 어떤 것은 완전한 시대에 관한 예언이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 다윗 왕이나 열두 사도가 천년 왕국 때에 이스라엘을 다스린다면 그들은 영광스런 몸을 입은 사람들과 아직도 여전히 육신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섞여 있는 세상을 다스릴 것이다. 부활한 영광스런 몸을 입은 사람들도 육신을 입은 사람들과 똑같이 생활할 수 있다. 부활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11번이나 나타나셨으며,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대화했고, 걸어다니셨다. 부활한 몸을 입은 사람은 그렇지 않는 사람과 자연스럽게 생활할 수 있다. 구약성경에도 천사들은 사람들처럼 먹고 마셨으며, 걸어 다녔다(창18:1-8).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부활한 영광스런 몸을 입은 사람들과 다가올 세상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천사들과 같을 것이라는 사실이다(눅20:35,36). 천사들은 이 땅에서 거주하며, 사람들과 어울려 살 수 있으며, 인간의 몸과 같은 육체를 입고 있으며, 마실 수도 있고 인간들과 결혼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을 살펴보기로 하자.
{오직 주를 앙망하는 자는 자기의 힘을 새롭게 하리니, 마치 독수리(천사들)가 날개로 치솟는 것 같을 것이요, 그들이 달려도 피곤치 않으며 걸어도 곤비치 않으리라}(사40:31).
이 말씀은 능력으로 부활한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말씀이다(고전15:42,43).
2. 정부의 위치
이 정부는 예루살렘에 자리잡을 것이다. 예루살렘은 이방인들의 때가 찰 때까지 이방인들에게 짓밟혔다(눅21:24). 예루살렘은 복원될 것이다. 선지자 에스겔은 이스라엘의 회복과 예루살렘의 재건축에 대해 자세하게 예언해 놓았다. 에스겔 48:1-35을 읽어보라.(천년왕국의 땅에 대한 도표를 참고하시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땅은 이집트의 강으로부터 유프라테스 강까지이다(창15:8). 에스겔은 더 자세하게 이스라엘의 경계를 말해 준다. 북쪽으로는 하맛까지이며, 다마스커스에서 약 100마일(약160km)의 길이이다(겔48:1). 남쪽으로는 타말에서부터 카데스에 있는 분쟁의 물에 이르고 대해에 이르는 강까지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약 100마일 가량을 포함한다(겔48:28). 주님이 다스리게 될 팔레스타인 왕토(Royal Grant)은 전에 12지파가 다스렸던 땅보다 8배이상 크다.
이 "왕토(Royal grant)"는 다시 12지파에게 분배된다. 북쪽에서부터 단, 아셀, 납탈리, 므낫세, 에프라임, 르우벤, 유다지파가 땅을 갖게되고, 중앙에는 성소가 위치한다.
"성소"
"Holy Oblation, "
는 너비가 25,000리드, 즉 사면으로 50마일( 정도의 크기이다. 에스겔서 45:5에 따르면, 한 리드란 6큐빗의 길이이다. 일큐빗은 일반적으로 18인치이다. 일 리드는 18인치에 손바닥의 너비인 3인치를 더한 21인치이다. 성소의 남쪽은 베냐민, 시므온, 잇사칼, 스불론 그리고 갓 지파가 자리잡고 있다.
"성소"는 다시 수평으로 3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북쪽 지역은 길이 25,000리드, 동서의 너비가 1000리드이다. 이곳은 레위 지파의 몫이다. 성소의 남쪽 지역을 레위지파는 농경지로 사용할 수있다. 농경지로 이용할 수 있는 남쪽 지역의 면적은 길이 25,000리드, 너비 5000리드이다(겔48:15-19).
정부가 자리잡고 있는 팔레스타인 땅의 중심지는 예루살렘이며, 예루살렘의 한 중앙에 성소가 위치한다. 성소는 옛날에 지어졌던 성전의 자리에 위치하겠지만, 그 크기와 규모면에서 구약의 성전보다 훨씬 크다. 에스겔서에 나오는 성전은 각 사면이 9마일이며 그 성읍의 외곽에 0.8km씩 있다. 이 성전은 새 예루살렘과 마찬가지로 각 면마다 3개씩의 문이있다(겔45:15-18, 30-35). 문의 이름은 야곱의 12아들의 이름을 따라서 붙여진다. 새 예루살렘에서 성전이나 지성소는 지어지지 않는다. 중앙에 주의 성소가 있을 뿐이다(겔48:10,20,21). 이것은 실로에 자리잡을 것이다. 실로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 땅을 정복하고 성막을 세웠던 곳이다. 그 성막은 솔로몬이 성전을 완공할 때까지 그곳에 있었다. 거룩한 길이라 불리는 대로가 있어서 새 도시의 성소로 향하게 해 줄 것이다(사35:8). 이 길은 양옆으로 가로수가 놓인 12마일의 아름다운 길이다.
새 성전, 즉 성소는 한면이 500리드, 약 1마일(1.6km) 정도의 너비이다(겔42:15-20). 솔로몬의 성전의 크기는 이것보다 작았다.
선지자 스카랴는 그날(천년왕국 때)을 이렇게 예언했다.
{그 날에는 생수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솟아나서 그 절반은 앞 바다(홍해)로 그 절반은 뒷 바다(지중해)로 흐르리니, 여름과 겨울에도 그러하리라}(슥14:8).
"생수"의 "근원"은 예루살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에 있는 성소안에 있다. 에스겔은 자신이 본 환상을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그는 동편을 향한 전의 문지방 아래에서 물이 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 전의 전면이 동으로 향해 있고 물이 제단의 남쪽에 있는 성전의 오른 편에서 나왔는데 수영을 할 수있을 만큼 충분히 많은 양이었다. 그곳은 음식 제물을 굽던 곳이다.
{그때 그가 내게 말씀하시더라. 이 물은 동쪽 지역으로 흘러 사막(예루살렘의 옆길)으로 내려가서 바다(사해)로 들어가나니, 바다(사해)로 들어갈 때 그 (사해의) 물들이 치유를(물의 소금기가 없어짐) 받으리라.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살아 있고 움직이는 모든 것들이 살 것이라. 또 이 물이 거기로 들어가므로 거기에는 매우 큰 고기떼가 있으리니, 이는 그 물들이 치유될 것이요 강이 흐르는 곳에는 모든 것이 살 것이라. 어부들이 그(사해) 위에 서리니, 엔게디(서쪽 해안)에서부터 엔에글라임(동쪽 해안)까지라. 이곳들은 그물을 치는 곳이 될 것이라. 그들의 고기들은 그들의 종류대로 있을 것이며, 큰 바다(지중해)의 고기처럼 심히 많으리라. 그러나 거기 진흙 구덩이와 늪은 치유되지 못하고 소금이 주어지게 될 것이라. 뚝 위에 강가로 이편과 저편에는 양식이 될 모든 나무가 자라고, 그 잎사귀들은 시들지 아니하며, 그 과실도 다하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로운 과실을 내리니, 이는 그 물이 성소에서 나옴이라. 또 과실은 양식이 되고 그 잎사귀는 약이 될 것이라}(겔47:8-12). 계시록 22:1,2과 비교해 보라.
"새 도시" 가운데 있는 새 성소의 자리는 지중해보다 지대가 1200피트나 낮다. 사해는 지중해보다 낮기 때문에 팔레스타인 땅에 지각 변동이 이루어질 것이 분명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이루어 질 것인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곳은 그분이 승천하신 올리브산이다(행1:8,9). 선지자 스카랴는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을 분명하게 예언해 놓았다.
{그(그리스도)의 발이 그 날에(그분이 재림하실 날) 예루살렘 앞 동편에 있는 올리브 산 위에 서시리니, 올리브 산은 그 중간이 동쪽과 서쪽으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생길 것이며, 산의 절반은 북쪽으로, 산의 절반은 남쪽으로 옮겨지리라.}
{온 땅이 게바에서 예루살렘 남쪽 림몬까지 평원처럼 바뀔 것이요, 예루살렘은 높여져서 그 곳에 사람이 거하게 되리니}(슥14:4,10,11).
이 엄청난 지각 변동은 지진이나 화산과 같은 자연적 현상으로 이루어 질 것이다.
{보라, 주께서 그의 처소에서 나오시며 내려오시어 땅의 산당들을 밟으실 것이요, 산들이 그 분 아래서 녹고 골짜기들이 갈라지되 불 앞에 밀초같이, 비탈에 쏟아져 내리는 물같이 되리니,}(슥1:3,4).
이 엄청난 지각 변동은 팔레스타인 땅의 표면을 평지처럼 만들어 놓을 것이며, 새로운 도시가 들어 설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줄 것이다. 사해와 지중해로 물이 흘러 들어 갈 수 있는 높이의 지대가 형성될 것이다. 에스겔 선지자는 그 때의 예루살렘의 이름이 "주께서 거기 계시다(Jehovah Shammah)"가 될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겔48:35). 천년왕국의 땅이란 도표를 참조할 것.
3. 성전과 경배
우리가 이미 앞에서 살펴 보았듯이 성전이나 성소는 거룩한 구역의 중앙에 자리할 것이다. 성전과 뜰에 대해서는 에스겔서 40:1-44:31까지 완벽하게 묘사되어 있다. 에스겔이 묘사한 그러한 성전은 역사상 건축된 적이 없다. 그러므로 스룹바벨이나 헤롯이 건축한 성전을 에스겔의 성전이라고 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예언의 성취가 아니다. 에스겔의 성전은 천년 왕국때 이 지상에 세워질 성전이다. 이 성전은 새 땅에 속한 것이 아니다. 에스겔의 성전에서는 물이 솟아나서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하지만 새하늘과 새 땅에서는 더 이상 바닷가 없기 때문이다(계21:1). 지금 있는 땅은 천년왕국이 지나고 나서 불로 완전히 새로와진다. 거기에는 요단 강이나 지중해, 사막등이 있을 수 없다.
"아론의 계열에 따른 제사장" 직분이 다시 복원될 것이며, 사독의 아들들이 제물을 드리는 임무를 맡게 될 것이다(겔44:15-31). 새 성전은 옛 성전에 비해서 없는 것이 참으로 많다. 성전에 언약궤가 없다. 만나를 담아 놓은 그릇도 없다. 아론의 싹난 지팡이도 없고, 자비석도 없으며, 금 촛대도 없다. "빵 차리는 상"도 없다. 돌판도 없으며, 향제단도 없다. 백성의 죄를 대속하거나, 중보하기 위해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는 지성소도 없다. 스카랴 6:12,13절을 보면 주님께서 친히 통치를 하시면서 대제사장이 되신다. 예레미야 23:5,6절의 "가지"(Branch)를 참조. 주님은 이 두가지를 겸직하신다.
레위지파가 성전의 직무를 감당하게 될 때, 그들은 자신들이 과거에 지은 죄로 인해 제사장적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된다(겔44:10-14). 그들은 단지 아침에만 어린 양과 번제를 위한 음식제물을 드릴 수 으며, 저녁에는 드릴 수 없다(겔46:13-15). 그들이 드릴 제물은 "번제물", "음식제물", "술붓는 제물", "속죄 제물", "화목 제물"(겔45:17),과 "속건 제물"(42:13)이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지켜야 할 두 개의 명절이 있다는 것이다. 첫째, 이들이 지켜야 할 명절은 유월절이다. 여기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속죄 사역을 예표하는 "유월절 어린 양"이 등장하지 않는다(겔45:21-24). 둘째, 이들이 지켜야 할 명절은 "장막절"이다. (슥;14:16-19). 이 명절들은 모든 민족들이 지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역병과 가뭄으로 치신다.
"오순절"의 명절은 이미 성취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사도행전 2:1-4에 기록되어 있는 "오순절"은 요엘2:28-32의 부분적인 성취일 뿐이다. 사도행전의 오순절에는 요엘서에 예언된 "하늘들과 땅에 이적들"이 보여지지 않았으며, "피와 불과 연기기둥들"도 없었다. 하지만 이 예언들은 "위대하고 무서운 주의 날"이 오기 전에 모두 성취될 것이다. 유대인의 민족적인 회심은 성령의 강력한 능력의 역사하심으로 일어날 것이며,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 주의 성령이 부어 질 것이다. 이 일이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일어날 것인지, 다른 사람들에게도 있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요엘서의 예언 자체가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 쓴 것이므로 사도행전의 오순절에 일어나지 않았던 성령의 역사는 유대 민족에게만 한정적으로 부어질 가능성이 크다. "정녕, 많은 백성과 강대한 나라들이 예루살렘에 계신 만군의 주를 찾으러 와서 주 앞에 기도하리라. 만군의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그 날들에는 열 사람이 민족들의 모든 언어에서 나와 붙잡으리니, 즉 유대인인 사람의 옷자락을 붙잡고 말하기를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리니, 이는 하나님께서 너희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하리라."(슥8:22,23). 그 날에는 이 세계에 단 하나의 종교밖에 없을 것이다(말1:11).
바빌론의 포로기에 성전을 떠났던 하나님의 영광이 이 때 다시 돌아와(겔10:18-20, 11:22,23) 성전을 가득하게 채울 것이다(겔43:1-5).
4. 천년 왕국의 특징
(1) 사탄의 결박(계20:1-3).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더 이상 어떤 변명도 하지 못하도록, 가장 완벽한 환경에서 살 수 있도록 기회를 부여하실 것이다. 이것이 인류에게 주어지는 마지막 시험이다. 인간은 여전히 죄가운데 살 것이고, 사탄과 연합하여 하나님께 반역을 저지를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앞에서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은 사탄때문이고, 그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난 완벽한 환경에서 산다면 결코 죄를 짓지 않았을 것입니다." 라고 변명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이런 요구를 들어 주실 것이다. 사탄은 결박되어서 끝없이 깊은 구렁에 가두어서 인간들에게 더 이상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도록 할 것이며, 인간들은 이제 외부의 적이 아닌 자신 안에 깊이 뿌리 박혀 있는 죄성을 가지고 완벽한 환경에서 1000년간의 삶을 살면서 시험을 받을 것이다.
사람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통치와 성령의 복된 역사 아래에서 자신들을 검증받아야 한다. 사람들은 지금까지 이런 세상을 살아 본 적이 없다. 그들은 사탄의 지배 아래에서만 살아왔을 뿐이다. 하지만 이 기간에는 사탄으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얻는다. 분명히 지금과는 다른 놀라운 세상일 것이다. 마음 속의 감정이나 악한 생각들을 자극하는 존재가 없어지고, 죄를 짓도록 유혹하는 존재도 없다. 인간들은 이제 화약은 있으되 폭발시키는 불이 없는 세상에 사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안에 내재하고 있는 뿌리깊은 죄성은 천년왕국이 끝날 무렵 그대로 나타날 것이다. 천년이 차면 사탄은 잠시 풀려 날 것이고, 그는 너무나 쉽게 민족들을 속여서 주님께 반역하도록 할 것이다.(계20:8).
천년 왕국의 기간동안에 "공중 권세 잡은 자"는 그의 보좌에서 쫓겨나고, "평화의 왕"이신 주님께서 보좌에 오르실 것이다. 큰 붉은 용이라고 불리는 사탄은 하늘에서 쫓겨날 때, 정사와 권세들과 자신에게 속한 어둠의 주관자들(엡6:12), 주님 보시기에 깨끗하지 못한 자들(욥15:15)과 모두 끌고 쫓겨날 것이다.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이 세상에는 절대로 평화가 있을 수 없다. 주님이 오셔야 민족들은 자신들의 칼을 녹여 보습을 만들 것이며, 자신들의 창들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다(ꎺ4:3,4). 이제 국가들은 더 이상 군비 경쟁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며, 군사비에 해당하는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될 것이다. 군용 비행기나, 거대한 잠수함, 핵 전함을 만드는데 돈을 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것들에 사용된 모든 철은 녹여져서 농기계를 만드는데 사용될 것이다. 전쟁 무기가 많은 나라일수록 포기해야 할 것도 많다. 이제 사람들은 전쟁 무기에 소비했던 모든 물자를 재활용함으로써 고갈났던 이 땅의 많은 자원을 보충할 수 있게 된다. 이 일에 어떤 정치적인 부정도 있을 수 없다. 조합이나 합병등이 없을 것이며, "환희의 해"의 법이 다시 세워지면 부동산의 양도도 있을 수 없다(레25:8017, 민36:4).
(2) 팔레스타인 땅의 회복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팔레스타인 땅을 점령했을 때,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며, 모든 과실이 풍성한 땅이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께서 주신 안식일의 계명만 지키면 이 땅은 그들에게 풍성한 수확을 안겨 주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우상을 숭배함으로써 자신들에게 주어진 축복을 스스로 망쳐 버리고 말았다. 하나님은 그 땅에 비를 주지 않으심으로써, 그들은 수확을 얻을 수 없었다(신11:13-17). 오늘날 팔레스타인은 땅의 토질면에서는 여호수아 때와 같이 여전히 비옥하다. 하지만 그 때처럼 비가 많이 내리지 않기 때문에 관개 수로가 잘 되지 않았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충분히 주시지 않으시지만, 천년 왕국 때에는 넘치게 주실 것이다. 이른 비는 10월과 11월에 내리는 비로써 땅을 갈고 씨를 뿌리는 시기에 내린다. 늦은 비는 4월과 5월에 내리는 비로써 풍성한 수확을 가져다 주는 비이다.
천년왕국 때에 팔레스타인 땅은 예전의 윤택했던 땅으로 되돌아 간다. 비만 충분히 내리는 것이 아니라 성전에서 흘러 나오는 수원(水原)으로 많은 강과 하천들이 생길 것이다.
{그날(천년)에 산들이 새 포도주를 떨어뜨릴 것이며, 작은 산들에는 젖이 흐를 것이요, 유다의 모든 강들(앞으로 생길 새로운 강)에는 물이 흐를 것이며, 주의 집에서 샘이 흘러 나와 싯팀 골짜기에 물을 대리라}(요엘3:18).
"산들이 새 포도주를 떨어뜨릴 것"이란 표현과 "작은 산들에는 젖이 흐를 것"이란 표현은 온 산들에 포도나무가 심기워져서 풍성한 열매를 거둘 것과 엄청나게 넓게 형성된 목초지에서 많은 소들이 풀을 뜯을 것이며 거기에서 젖을 짤 것이란 시적인 표현이다.
이 때에는 엄청나게 많은 양을 수확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은 이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주가 말하노라. 보라, 그 날들(천년)이 이르리니 밭 가는 자가 추수꾼을 앞서며 포도를 밟는 자가 씨 뿌리는 자를 앞서리라. 산들은 단 포도주를 떨어뜨릴 것이요, 모든 작은 산들은 녹으리라}(암9:13).
{광야와 메마른 곳이 그들을 기뻐하고, 사막이 기뻐하며 장미처럼 피리라}(사35:1).
{가시나무를 대신하여 잣나무가 나오며 찔레를 대신하여 도금양나무가 나올 것이라. 그것이 주께 한 이름이 되어 끊어지지 아니할 영원한 표적이 될 것이니라}(사55:13).
{그때 땅이 그 소산을 낼 것이요}(시67:6).
{타작 마당들은 밀로 가득 차고 독들은 포도주와 기름으로 넘쳐 나리라. 내가 너희 가운데 보냈던 나의 큰 군대인 메뚜기와 자벌레와 풀쐐기와 모충이 먹었던 연수를 내가 너희에게 갚아 주리니 너희는 풍족이 먹고 만족할 것이며 너희를 경이롭게 다루셨던 주 너희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리라. 내 백성이(유대인) 결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요엘2:25-26).
(3) 동물들의 세계의 변화
{또한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울 것이요,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하며 어린 아이가 그들을 이끌리라.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들이 함께 누울 것이요,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으리라. 또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으리라. 그들은 나의 모든 거룩한 산(예루살렘)에서 해치거나 파괴시키지 않으리니, 이는 마치 물들이 바다를 덮음같이 세상이 주의 지식으로 충만할 것임이니라}(사11:6-9).
우리는 이 말씀을 읽을 때 영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없다. 동물들은 아담이 타락하기 전, 에덴의 동산에서처럼, 노아의 방주 안에서 처럼 온순해 질 것이다. 땅의 회복과 함께 동물들도 온전히 구속받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동물들의 야성이 완전히 제거된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기록했다.
{모든 창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고통받는 것을 우리가 아노니 그들뿐만 아니라 성령의 첫열매들을 가진 우리까지도 속으로 신음하며 양자되는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고 있느니라}(롬8:22-23).
인류가 죄의 결과로부터 빚어진 몸의 상태를 새하늘과 새땅에 살기에 알맞은 몸의 형태로 변화될 때까지 동물들은 기다려야 한다.
(4) 인간의 수명이 길어질 것이다.
{거기에는 날 수로 되는 아기도 자기 수명을 다 채우지 못한 노인도 더 이상 없을 것이니 이는 백 세에 죽는 자가 아이요 백 세가 된 죄인은 저주를 받은 것이 될 것임이라}(사65:20).
백세가 어린 아이로 취급받는다면 어른은 몇살을 산단 말인가? 최소한 몇 백년은 살지 않겠는가?
{이는 내 백성의 수명이 나무(오크 나무)의 수명과 같겠고}(사65:22).
{만군의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예루살렘의 거리들에는 여전히 늙은 남자들과 늙은 여자들이 살 것이며, 사람마다 나이 많음으로 인하여 손에 지팡이를 잡을 것이라(슥;8:4).
이 때는 사람들이 최소한 홍수 이전에 족장들이 누렸던 수명으로 늘어나 살 것이다. 기후와 환경적인 변화로 인해 사람들의 수명이 길어질 것이다. 성소에서 흘러 나오는 "새 강"은 병을 치유하고, 장수를 누리도록 해 줄 것이며, 강둑에서 자라는 나무 잎사귀들은 "약"으로 사용될 것이다(겔47:12).
(5) 빛이 일곱배나 밝아 질 것이다.
{또 주께서 자기 백성의 터진 자리를 싸매시고 매맞은 상처를 치유하시는 날에, 달빛이 햇빛같이 될 것이요, 햇빛은 일곱 날들의 빛과 같이 일곱 배가 되리라}(사30:26).
천년 왕국 때의 "대기권"은 지금과 다를 것이다. 달이 지금의 낮처럼 빛나고, 태양은 지금의 밝기보다 일곱배나 될 것이다.
{태양이 더이상 낮에 네 빛이 되지 아니할 것이요, 달도 광명으로 네게 빛을 내지 아니하리니, 오직 주께서 네게 영원한 빛이 되시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시리라. 네 태양은 더이상 지지 아니하며 네 달도 물러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주가 너의 영원한 빛이 될 것이며 또 네 슬픔의 날이 끝나게 될 것임이라}(사60:19-20).
{그 도성은 해나 달이 그 안에서 비칠 필요가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그 곳을 비추고 어린 양이 그 곳의 빛이 됨이라. 그리하여 구원받은 자들의 민족들이 그 도성의 빛 가운데서 걷겠으며 땅의 왕들이 그들의 영광과 존귀를 그 곳으로 가져오리라}(계21:23-24).
천년왕국 때의 이스라엘 민족의 임무는 이방민족들의 빛이 되는 것이다. 이 때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들 가운데 으뜸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다.
{주께서는 너를 머리가 되게 하시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신28:13).
현재 이스라엘은 머리가 없이 몸만 가진 민족이다. 오늘날 그들은 이 세상에서 최고의 민족이 아니다. 그 때에는 열방의 우두머리가 될 것이다. 만약 이스라엘을 섬기지 않는 민족들은 하나님께 벌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용감히 행하리니, 주는 우리의 원수들을 밟으실 분이심이니이다}(사60:12).
주님은 천년이란 기간동안 철장으로 다스리실 것이다. 시편 2:6-9에는 메시아 왕국의 통치 방법이 잘 드러나 있다. 천년 왕국의 통치기간에도 하나님의 뜻은 하늘에서 이루어지신 것같이 땅에서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천년이란 기간 동안에 각 나라들 사이에 있을 평화는 진정한 평화라기 보다는 어쩔 수 없는, 또는 가식적인 것이다. 사람들은 주님께 순종하는 형식만 취할 뿐이다. 사탄이 풀려나서 사람들을 미혹할 때 그들은 적극적으로 사탄에게 동조해서 주님께 반역을 할 것이다. 사탄이 끝없이 깊은 구렁에서 풀려나서 이 땅에 오면, 이미 자신의 거짓말을 믿을 수많은 사람들이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사탄을 맞이할 준비를 해 놓은 듯이 그에게 동조하고 순종할 것이다. 그는 온 땅에서 사람들을 모아서 역사상 가장 큰 군대를 모집하여 전쟁을 일으킬 것이다. 사탄은 "성도의 진영"을 감싸고, 곧 이어 "사랑하시는 도성"을 에워 쌀 것이다. 이 때 하나님께서 반역자들을 무찌르기 위해 "하늘의 군대"를 내려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불"을 내려 보내서 다 삼켜 버린다. 그들을 미혹했던 사탄은 산채로 불못에 던져져서 밤낮으로 영원무궁토록 고통을 받게 된다.
이상에서 우리는 "천년왕국의 경륜"에 대해 공부했다. 앞서 공부했던 여섯 경륜와 마찬가지로 천년의 기간이 끝날 때는 배교로 막을 내린다. 하나님께서는 "무죄의 경륜," "양심의 경륜", "인간 정부의 경륜", "한 가족을 불러 내신 경륜"(노아), "율법의 경륜", "은혜의 경륜" 그리고 마직막으로 "주님이 직접 다스리시는 경륜"를 통해서 인간에게 기회를 주셨지만 인간은 아무런 희망이 없으며, 형편없이 변질되었으며, 심판을 제외한 어떠한 처방도 있을 수 없는 존재임을 증명해 주었을 뿐이다.
왕이 실재하Presence of the King는 1000년이란 긴 시간 동안 땅에서 살면서, 그것도 사탄의 영향력도 받지 않는 상태에서 자발적으로 그에게 동조하여서 하나님께 반역을 꾀하였다면, 이제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하실 수 무슨 일이 더 남아 있을 수 있겠는가? 인간적으로 말한다 해도, 인류를 멸하는 길이외에 선택의 길이 있겠는가? 또 다시 홍수를 일으키셔서 모두 쓸어 버리시지 않으시겠는가? 하지만 주님은 이런 방법을 쓰실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다시 땅을 물로 심판하시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창9:11).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즉 하나님께서는 불로써 이 땅을 정화시켜 버리시는 것이다(벧후3:7).
'경륜 > 하나님의 경륜' 카테고리의 다른 글
10. 이방인들 (The Gentiles) (0) | 2009.01.20 |
---|---|
11. 교회 (The Church) (0) | 2009.01.20 |
14. 영의 세계 (The Spirit World) (0) | 2009.01.17 |
15. 영성술 (spiritism) (0) | 2009.01.17 |
16. 부활들 (The Resurrection) (0) | 2009.01.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