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교회역사에 관하여

제 4 강 17, 18, 19 세기

무형11 2009. 8. 31. 13:10

제 4 강  17, 18, 19 세기


1. 이 강의는 17세기 (AD 1601년)의 초엽에서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이 중요한 교회들의 역사를 너무 바삐 지나와 버렸으니 이는 부득이 한 사정이었다.
 
2. 이 삼세기 동안 전혀 새로운 교파가 설립되었다. 어떤 역사가들이 회중교회(처음에는 독립파라 불렀음)가 시작된 연대를 1602년 이라 말하고 있음은 정확한 것이다. 그러나 쉐프 - 헬조그는 그 백과사전에서 회중교회의 기원을 그보다 훨씬 앞서 16세기에 두고 있으며 루터교회나 장로교회와 같은 시대에 된 것이라 말하고 있다. 종교개혁 와중에는 카톨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나와 버렸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은 루터나 칼빈이 영도하였던 종교개혁의 범주에서는 도저히 만족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교직자가 교회를 다스린다는 관념을 버렸으며 콘스탄틴의 교권제도에 가담하기를 거부하였던  사람들이 이제까지 15세기 동안에나 지켜 내려온 신약성경의 민주적인 원리로 돌아가야 한다고 결정하였던 것이다.

3. 이 특수한 개혁을 요구하는 이 새로운 단체의 확고한 주장은 그들의 머리 위에 카톨릭이나 루터교회 그리고 장로교회와 영국 교회 등 모든 기성교회로부터 가혹한 핍박을 초래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교파 역시 카톨릭이 범한 수많은 과오를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이를테면 침수례 대신에 유아세례나 물뿌림 세례를 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는 극단적인 국가 교회의 관념을 채택하여 이를 실시한 것 등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미국으로 피난하여 온 후에는 그들 자신이 또한 가혹한 핍박자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4. 독립파 혹은 오늘날 회중교회라 불리는 이 명칭은 그들이 만든 교회의 운영 제도에서 온 것이다.  
쉐프 헬조그의 백과사전에 기록되어 있는 영국 회중교회의 특수한 주장 몇 가지를 들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①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유일한 머리시며, 하나님의 말씀은 그 유일한 법이라는 것.
② 눈에 보이는 교회들은 순수한 신앙적 목적 하에 이 세상에서 뭉친 경건한 사람들의 특수한 단체이며 이 세상과 혼동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
③ 분리된 이러한 교회는 그들 자신의 직원을 선정하며 규율을 유지해 갈 수 있는 충분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
④ 내부적인 교리에 있어서는 모든 교회는 독립이며 동시에 국가의 관리를 받지 않는다는 것.

5. 이러한 주장은 카톨릭은 물론이요 루터교나 장로교 그리고 영국교회의 감독주의와는 전혀 상이하지 아니한가? 그러나 오늘날의 침례교회와 옛날의 침례교회 그리고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기본 가르침에 아주 동일하지 아니한가?

6.
1611년에는 킹 제임스 판의 영어 성경이 나타났다, 이때 까지는 성경이 일반 사람들에게 널리 주어진 일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일반에게 전파되기 시작함에 따라 갑자기 교황의 권리는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적어도 여러 세기 만에 처음으로 신앙의 자유라는 관념이 싹트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7.
1648년에 [웨스트팔리아의 평화]라는 것이 이루어졌다. 이 평화조약의 결과로써 나타난 여러 가지 중에는 큰 교파간에 삼자협정이라는 것이 있었다. 즉 이것은 카톨릭, 루터교회, 장로교회가 서로 더 이상 박해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교파 사이의 박해는 곧 그 교파를 지지하고 있었던 정부와 전쟁하는 것을 의미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모든 성도들 특히 아나-밥티스트 교도들은 이러한 교파의 사람들로부터 예전과 다름없는 가혹한 대우와 처참한 핍박을 계속 받아야만 했다.

8. 제17세기  동안에는 왈덴시스, 아나-밥티스트 및 밥티스트(이제 어떤 곳에서는 아나[Ana]라는 말이 떨어져 버렸음)들에 대한 치명적인 박해가 계속되고 있었다. 이를테면 영국에서는 존 번역과 그의 여러 사람들이 증명하고 있는 바와 같이 영국 교회에 의하여 독일에서는 루터교도들에게, 스코틀랜드에서는 스코틀랜드 교회(장로교)에 의하여, 이탈리아와 프랑스 그리고 교황의 제도가 권력을 잡고 있었던 모든 곳에서는 카톨릭교인들이 그들을 핍박하고 있었다. 이제 국가교회 또는 그 중의 어떠한 교회와도 타협을 하지 않았던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곳에서나 편안함이 없었던 것이다.

9. 정확한 역사의 기록에 의하면 벌써 4세기의 옛날에 교권제도에 가입하기를 거절하였고 유아 때 받았던 세례를 부인하며 침례에 의한 중생의 교리를 부인하였고 또한 교권제도하에 있었던 사람들로서 그들에게로 온 사람들에게 재침례를 요구하였던 이러한 사람들이 아나 밥티스트(Ana-Baptist) 라고 불리웠던 것은 의미 깊은 일이다.
그러나 그때 그들에게 어떠한 명칭을 붙이었든 상관할 것 없다. 그들은 항상 아나 밥티스트[재침례파]라 불리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6세기의 초엽에는 아나가 떨어지고 그저 밥티스트라는 단순한 이름으로 되었으며 그 후에는 차츰 다른 이름은 다 떨어졌던 것이다. 만약 존 번연(John Bunyan)이 좀 더 이전 시대에 살고 있었더라면 그 제자들은 번연니스트(Bun-yanist)혹은 아나 밥티스트라 불리었을 것이다.
 
10. 밥티스트(Baptist)라는 명칭은 별명인 바 이는 그 반대자들이 그들에게 붙여준 이름이다. (만약 명칭이 주님께서 요한을 밥티스트라 부르셨을 때와 같이 구세주 자신이 그들에게 주신 것이라면 바로 적합한 것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 때까지는 어떤 단체의 침례교도들이라도 이 이름을 공식적으로 채택한 일은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름은 확정되었고 그들이 자발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으며 또한 자랑스럽게 여겼던 것이다. 사실 그 이름은 꼭 알맞은 명칭이었다. 이는 오늘날 침례교회가 지키고 있는 교리를 처음으로 가르쳤던 그리스도의 뛰어난 선구자의 칭호였던 것이다.
 
11. 나는 쉐프 헬조그의 백과사전 1권 p.210 에 있는 유럽의 침례교회사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몇 마디를 인용하려 한다.
밥티스트가 스위스에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1523년경 인데 거기서 그들은 쯔빙글리와 로마 카톨릭의 박해를 받았었다. 그들은 1525년에서 1530년 사이에 남부 독일과 티롤 그리고 중부 독일에서 크고 충실한 교회들을 조직하였다. 이러한 모든 곳에서도 박해는 그들의 생활을 참혹한 것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주- 이것은 모두 개신교 곧 루터교회, 성공회, 장로교회가 성립되기 이전의 일이다.)
계속하여 좀 더 인용하기로 하자.
모라비아는 크나큰 자유를 약속하는 곳으로 보였다. 그러므로 침례교도들은 그곳으로 이주해 갔다. 그러나 그들의 희망은 기만 당하였을 뿐이었다. 1534년 이후에는 그 수효가 늘어 갔으며 북부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 윌룬 지방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그들은 그저지대 나라의 알바의 지배하에서도 그 수효가 증가되어 갔으며 놀랄 만한 선교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주 - 선교열, 오히려 어떤 사람들은 완고한 사람들이 초기의 침례교도라 말하고 있다.) 그러면 이러한 침례교도는 어디서 온 것일까? 그들은 종교개혁 시절에 카톨릭에서 나온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들은 종교개혁 이전에도 큰 교회들을 가지고 있었다.
 
12. 대단히 흥미로운 사실이지만 여러 세기가 지나감에 따라 영국에 종교적 변화가 있었던 것에 대하여 유의하기 바란다. 복음을 영국으로 전파한 것은 사도들의 손이었지만 영국의 교회들은 제 4세기 초엽 교권제도가 확립되기까지 또 그 후 한 세기 이상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카톨릭적인 교회로 급속도로 발전되어 교권제도의 권력하에 놓이게 되었고 영국의 교회들은 카톨릭 그대로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헨리 8세의 통치하 1534년에서 35년까지 일어났던 분열 때까지 그것은 영국의 국교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당시 그것은 영국교회라는 명칭을 받게 되었다. 18년 후 곧 1553년에서 1555년까지 여왕 메리(피의 메리)가 통치하는 동안에 영국은 카톨릭으로 되돌아 가게 되었던 바, 피의 5년간이란 바로 이 시기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메리의 이복 동생 즉 앤보레인의 딸 엘리자베스가 1558년 왕위에 오르자 다시 카톨릭을 뒤집어 엎어 버렸으며 영국교회가 재차 세도를 부리게 되었다. 이리하여 다음 한 세기 동안 모든 것이 그대로 계속되었으며 짧은 기간이나마 장로교회가 우세하게 되어 마치 장로교회는 스코틀랜드에서와 같이 영국의 국교가 된 것 같이 보였다. 그러나 올리버 크롬웰 시대에 뒤이어 영국교회는 본래의 위치에 돌아오게 되었고 그 후부터는 영국의 국교로써 존속하게 되었던 것이다.
 
13. 영국의 종교적인 문제에 있어서 국가교회의 가혹하고 잔악한 박해가 점차로 완화되어 가고 있었던 것에 주의 하기 바란다.
그 교회가 시작된지 154년 후인 1688년에 최초의 관용령이 나왔다. 이 법령은 두 교파 즉 카톨릭과 유니테리안을 제외하고는 영국에 있는 모든 교파를 믿어도 좋다는 것이다.
두 번째의 관용령은 89년 후 즉 1778년에 나왔다. 이 법령은 카톨릭을 믿는 것을 허락하였으나 여전히 유니테리안의 신앙은 허락하지 않았다.
세 번째의 관용령은 35년 후 곧 1813년에 나왔다. 이 법령에는 유니테리안도 허용되어 있다.
1828년과 29년에 이르러 소위 선서조령이라는 것이 발표되었다. 이 법령은 비국교화(죽 영국 국교와 의견이 상반되는 신앙을 갖고 있는 자들)에게 관직과 국회의원이 될 수 있는 길을 허락하여 준 것이다.
1836년에서 37년 사이와 1844년에 등록령과 혼인령이 나왔다. 이 두 법령은 비국교도들이 행하는 침례와 결혼을 합법화한 것이었다.
개혁법안이 1854년에 나왔다. 이 법안은 비국교도의 학생들에게도 옥스퍼드와 캠브리지 두 대학의 문호를 개방시켜준 것이다. 이때까지 비국교도의 자제들은 이 유명한 대학의 어느 쪽에도 들어갈  없었던 것이다.
 
14. 이렇게 영국에 있어서는 신앙의 자유에 대하여 발전이 있었지만 참다운 신앙의 자유라는 것은 국교가 확립되어 있다든지 또한 그것이 존속하고 있는 나라에 있어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며 참다운 신앙의 자유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한 나라 안에 있는 여러 교파 중에서 단 한 교파만이 정부에 의하여 유지되며 정부의 편애와  지지를 받고 다른 모든 교파를 배척하는 한 완전한 신앙의 자유와 평등의 가능성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15. 바로 18세기 초엽에 세 아이가 영국에서 탄생하였으니 이들은 후에 깊숙하고 또한 지울 수 없는 발자취를 남겨 놓았다. 이 사람들은
죤 웨슬레이찰스 웨슬레이 그리고 죠지 휫필드였다.
죤과 찰스 웨슬레이는 에프워어쓰(여기에서 에프워어쓰 연맹이라는 명칭이 생기게 되었다.)에서 탄생하였으며 죤 웨슬레이는 1703년 6월 28일에 찰스 웨슬레이는 1714년 12월 27일 글로우시스터서 태어났다. 여기서 이들의 전 생에 관한 것을 말할 수는 없으나 말할 만한 가치가 있으며 되풀이하여 말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들은 다 같이 영국교회의 회원이었으며 성직자가 되기 위해 공부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그들 중에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고, (그 당시 영국의 성직자들은 거의 구원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 당시 정상적인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종종 부모가 그들의 직업이나 유산을 아들에게 계승시키려고 직업을 결정하였다는 것을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마침내 구원받고 말았다. 실로 놀랄 만한 변화였다.
16. 이 사람들은 새로운 교파의 창설자가 되려는 욕망을 가졌던 것 같이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영국교회의 내부에서 순수한 신앙의 부흥과 정신적인 개혁이 일어나기를 열망하고 있었으며 또한 성실히 노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영국과 미국에서 이 일을 수행하려고 노력하였으나 그들 자신들의 교회였던 영국교회는 그들에게 문을 닫아 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집회는 때때로 야외에서 또는 어떤 개인의 집에서 개최되었고 특히 휫필트의 경우에는 다른 교파의 집회소에서 열기도 하였다.
휫필드의 위대한 설교는 그가 가는 곳곳마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던 것이다.  
 
17. 감리교회가 창설된 정확한 날짜를 알아내기는 퍽 어려운 일이지만 의심할 바 없는 것은 감리교의 정신은 감리교 교회보다 앞서 있었다는 것이다. 이들 세 청년이 대학을 졸업하기 전부터 감리교도들이라 불리었으며 그들의 최초의 조직체는 소사이어티(society)라 불렀다. 영국에서 그들이 첫 번째 연례총회는 1744년이었다.

감리교 감독파 교회는 1784년 미국의 발티모아에서 공식적으로 조직되었는데 그 성장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그러나 영국교회 즉 성공회에서 그들이 나올 때 모교회(母敎會) 또는 조모교회(祖母敎會)가 갖고 있었던 많은 과오를 함께 가지고 나왔다.  이를테면 감독제도나 직자 교회운영체제 간은 것이다. 이러한  점에 관하여 그들의 내부에는 많은 다툼과 분열이 있었으며 그 외에도 허다한 논쟁과 문제가 있었으니 이는 유아세례를 베푸는 것과 침례대신 세례를 행하는 것 등이다. 그러나 그들이 간직하고 있는 한가지의 위대한 것이 있으니 이는 곧 그들이 모교회에서 나올 때 함께 가지고 나오지 않았던 영적 믿음인 것이다.
 
18. 1788년 9월 2일 아일랜드의 안트리움에서 한 아이가 탄생했다. 그는 장차 세상 모처에서 신앙 각성 운동을 일으켜 새로운 교파의 창설자가 될 아이었다. 이 아이는 알렉산더 캠벨이다.   그의 아버지는 장로교회 목사였다. 그의 아버지 토마스 캠벨은 1807년 미국으로 건너왔었고 그의 아들 알렉산더는 그때 대학에 다니고 있었으나 후에 도미했다. 견해의 차이로 인하여 그들은 장로교회를 떠나 크리스챤 협회라는 독립된 단체를 조직하였는데 이는 브레스런(Brethren:형제교회)교회로 알려져 있는 단체였다. 그들은 1801년 침수례에 의한 침례를 채택하였고 한 침례교회의 목사로부터 침례를 받았으나 침례교회와는 연합하지 않겠다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알렉산더는 모두 침례를 받았다. 1813년 그들의 독립교회는 레드스토운의 침례교회 협회와 연합하였다. 그러나 10년 후 그들은 논쟁으로 인하여 그 협회를 떠나 다른 단체에 가입하였고 그 후에도 논쟁은 끊임없이 계속되어 그들은 또다시 그 단체를 떠나고 말았다. 그들은 결코 침례교도가 아니었으며 지금까지 내가 읽어 본 기록에 관한 그들이 침례교도였음을 주장할 아무 근거도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교회의 역사 특히 침례교회의 역사를 논하면서 존 번연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은 옳지 않을 것이다. 영국사나 세계사에서 각 장 유명한 인물 중 한 사람이 침례교회 목사 존 번연은 12년간이나 벨포드의 감옥에 갇혀 있었는데, 감옥에 있는 동안 그는 온 세상에서 가장 이름 높고, 성경다음으로 널리 보급되고 있는 천로역정을 기록하였다. 그는 가혹한 박해를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 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사람이다.  또한 존 번연의 이야기는 주일학교의 도서실에도 반드시 갖추어 두어야 할 책일 것이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이 책을 읽는다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교회 역사 중 가장 감명을 주는 이야기 중 하나는 웨일즈 침례교도들의 이야기이다. 미국의 침례교도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영향을 웨일즈 침례교도에서 받았다. 완전히 조직된 여러 침례교회들이 한꺼번에 웨일즈에서 미국으로 이주하여 왔기 때문이다.(Orchard p.21-23; Ford chap. 2)

웨일즈에서 복음 사역이 시작된 이야기는 대단히 흥미가 있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신약에서부터 시작된다(행 28:30-31, 딤후4;21). 클라우디아와 푸데가 로마를 방문한 것, 바울의 설교를 듣고 구원받은 것, 또 그들의 조국 웨일즈에 복음을 가지고 돌아간 것 등은 대단히 흥미있는 일이다. 바울이 로마에서 이 설교를 한 것은 A.D 63년의 일이었다. 그 후 곧 클라우디와 푸데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 중에서 두 설교자가 함께 같은 복음을 영국 특히 웨일즈에 가지고 갔던 것이다. 웨일즈 침례교도들이 미국의 침례교도들에게 얼마나 많은 도움을 주었는지는 실로 측량할 수가 없다.

 

 

 

 

'교회 > 교회역사에 관하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1강 : A.D 30~500  (0) 2009.08.31
제 2 강(講) : A.D 600∼1300  (0) 2009.08.31
제 3 강 A.D 1400~1600  (0) 2009.08.31
제 5 강 미 합중국의 종교 (2)  (0) 2009.08.31
후 기 (後 記)  (0) 2009.0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