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교회역사에 관하여

제 3 강 A.D 1400~1600

무형11 2009. 8. 31. 13:12

제 3 강 A.D 1400~1600


 

   1. 다음의 3세기 동안 즉 15, 16,17세기는 세계 역사상 가장 다사다난(多事多難)하였던 세기였으며 특히 교회 역사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였다. 카톨릭 교회(로마와 희랍파 둘 다)의 내부에서는 일종의 종교개혁을 모색하는 혁명이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오랜 세월을 두고 잠잠하고 있었던 정의의 양심들은 드디어 각성되었고 순수한 종교개혁의 요구는 바로 13세기에 도는 그보다 조금 먼저부터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역사는 그것을 분명하게 증명하고 있다.
 
   2. 조금 전 시대로 돌아가 보기로 하자. 신약성경의 가르침에서 아주 분리되었으며 기이하고 잔악한 많은 법령과 말할 수 없이 부패된 도덕적 상태 그리고 손과 옷이 수백만의 순교자들의 생생한 피로써 물들어 있었던 카톨릭은 많은 카톨릭 신자 자신들의 증오와 심각한 배척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조직이나 법령 그리고 교리나 의식보다 훨씬 뛰어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카톨릭 안에서도 가장 용감하고 뛰어나고 영적인 신부들과 지도자들의 얼마는 한 사람 또 한 사람씩 카톨릭의 가장 그릇된 교리와 법령을 개혁하고 돌이켜 최소한 신약의 뚜렷한 가르침에 접근시켜 보려고 시도했던 열렬한 사람들이 있었다. 몇몇 저명한 실례를 들어 보기로 하자. 우리는 다만 어느 정도의 그리고 어느 곳에서 개혁의 봉화가 일어났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 주의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 개혁의 지도자들에게도 주의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한 지도자들은 모두 카톨릭의 사제들이나 또는 어떤 종류의  직분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악한 세대 속에서 약간의 선(善)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시 이 당시에는 신약의 교리가 조금도 곡해되지 아니하고 그 본래의 순결함을 보존되고 있었던 것은 거의 하나도 없었다.
이제는  몇몇 개혁자들과 그들이 활동하였던 곳에 대하여 주의하여 보기로 하자.   
 
   3. 그러나 주목할 만한 것은 이 위대한 종교개혁 시대에 앞선 여러 세기 동안에도 카톨릭의 이단적인 교리에 항거했던 수 많은 저명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열렬히 성경에 충성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행한 일이란 오직 피 흘린 발자취 뿐이었다. 이제 우리는 잠깐 동안 이 유명한 시대 즉 종교개혁에 대하여 연구하여 보기로 하자.
 
   4. 1320년에서 1384년까지 영국에 있어서는 온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킬 만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존 위클리프"였다.. 그는 카톨릭 교회의 내부에서 참된 개혁을 단행하여 보려는 용기를 가지고 있었던 용감한 사람들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는 역사상에서 때로는 종교개혁의 새벽별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는 진실하고 보람있는 생애를 보냈던 사람이었다. 존 위클리프의 전 생애를 포함하는 역사를 만들려면 실로 여러 권의 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카톨릭의 교권제도의 지도자들에게서 온갖 미움을 받았었고 언제나 그의 목숨을 엿보는 사람들로 인하여 피해 다녀야 했으며 결국 중풍병으로 몇 해 후에는 그의 위골을 파내어  불사르고  그 재는 바다에 뿌려 버리게 하였다.
 
   5. 존 위클리프의 뒤를 이어 멀리 보헤미아에서 한 저명한 인물 "존 후스"(1373~1415) 라는 사람이 나왔다. 그의 마음은 영국의 새벽별인 위클리프의 찬란한 빛에 감화되어 이에 호응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생애는 용감하고도 다사다난하였으나 애석하게도 짧은 일생이었다. 그는 참된 개혁에 호의를 가지고 있었던 카톨릭 교인들의 심금(心琴)을 움직이게 하는 대신에 공포와 증오 그리고 반대를 일으켰으며 그 결과로 그는 화형(火刑)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자신의 국민들에게 죽임을 당한 순교자의 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국민들이 선양하여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는 주님을 사랑하였고 그의 국민들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그는 수백만의 사람들이 죽어야만 했듯이 그들 중 하나가 되었다.
 
   6.  보헤미아의 존 후스 다음에는 이탈리아의 훌륭한 사람 곧 놀라운 설교자 "사보나롤라"(1452~1498)가 나타나게 되었다. 존 후스가 화형을 당한 것은 1415년이며 사보나롤라가 탄생한 것은 이보다 37년 후 였다. 후스와 마찬가지로 그는 경건한 카톨릭 교인이었으나 국민의 지도자들과 자기 국민들(이탈리아 사람들)역시 보헤미아의 지도자들과 같이 모든 개혁에 반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 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설교는 많은 사람들의 양심을 각성시켰고 상당한 수의 제자들을 얻는데 성공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교권제도 안에서의 참된 개혁을 한다는 것은 그 조직체의 상부층을 완전히 무너뜨려 버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였었다. 그러므로 사보나롤라는 가장 뛰어난 존재였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싸운 상대는 강대한 조직체였으며 또한 그 단체도 존속하기 위해서는 개혁 운동자들과 싸울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사보나롤라는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7. 물론 이 시대에 있었던 개혁자들의 이름을 열거함에 있어서도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다 들지 못하고, 이곳에 서는 가장 현저하게 역사상에 나타난 사람들의 이름만을 말하기로 한다. 황금의 혀를 가지고 있었던 이탈리아의 웅변가의 뒤를 이어 스위스에 한 사람이 나타났다. 쯔빙글리는 사보나 롤라가 죽기 전에 태어났고 그는 1481년에서 1531년까지 살았으며 그 불길은 점점 빨라져서 급속도로 확대되어서 이제는 이것을 조정하기가 더욱 어렵게 되어 버렸다. 쯔빙글리로 말미암아 일어난 이 봉화는 다른 또 하나의 불길이 일어나기 가지 약간 부분적으로 시들어 갔으나 남아 있는 다른 모든 것보다 참된 것이었으며 독일에서 폭발되었던 것이다. 쯔빙글리는 전쟁 중 죽었다.
 
   8. "마틴 루터"는 15,16세기의 모든 개혁자들 중에서도 가장 저명한 사람이었으며 1483년에서 1546년까지 살았었고 그 연대로 비추어 보아 쯔빙글리와 거의 동일한 시대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쯔빙글리보다 1년 먼저 나서 15년간이나 더 오랜 살았다. 아마 역사가 명확히 진술하는 이상으로 더욱더 그의 위대한 선배들은 그에 앞서서 험난한 길을 평탄케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더욱이 그는 선배들이 당하였던 험악한 경험에서 배웠고 그후 자기 자신이 당하였던 경험을 통하여 카톨릭 내부에서의 순수한 개혁은 전혀 불가능하다는 것을 더욱 철저하게 알 게 되었다. 너무나 많은 개혁의 방법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한가지의 방법은 다른 또 하나의 방법을 요구하게 되었고 다른 또 하나의 방법이 필요하게 되었다.
 
   9. 그리하여 마틴 루터는 카톨릭의 지도자들과 여러 가지 어려운 싸움을 겪은 후 멜랑크톤과 그 외의 저명한 독일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1530년, 대체로 그 시기에 전혀 새로운 교회로서의 조직체 즉 루터교회라고 부르는 단체를 창설하게 되었던 것인데 그 후에는 독일교회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로마에서 직접 갈라져 나온 조직체의 하나였으며 카톨릭 모교회(카톨릭교회는 이렇게 불리웠으므로)에 대한 모든 관계를 거부하고 존속하여 왔다.
 
   10. 이제 우리는 초기의 루터교회 다음에 일어난 영국교회에 관한 것을 잠깐 제쳐놓고 대륙의 종교개혁을 살펴보기로 하자.
1509년에서 1546년 사이에 도 하나의 위대한 종교개혁자가 되었으니 프랑스 사람 "존 칼빈"이었다. 그는 당시 스위스에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사실 그는 유능한 사람이었고 30년 동안은 루터와 같은 시대에 살고 있었으며 쯔빙글리가 죽었을 때 그는 22세였다. 칼빈은 장로교회의 창설자라고 불리우고 있는데 어떤 역사가 중에는 쯔빙글리가 그 창설자라고 한다. 역시 믿을 만한 증거에 의하면 아무래도 칼빈이 그 창설자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루터의 그것과 꼭 마찬가지로 쯔빙글리의 활동은 칼빈의 사업을  대단히 용이하게 만들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조차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1541년 루터가 루터교회를 설립한지 꼭 11년만에(바로 그 해로 보인다.) 장로교회가 창설되었던 것이다. 이것 역시 루터교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개혁한 사제 또는 적어도 직분을 맡고 있었던 사람들에 의하여 지도되었던 것이다. 이들 여섯 사람 - 위클리프, 후스 , 사보나 롤라, 쯔빙글리, 루터 및 칼빈 등 종교개혁을 위한 그 위대한 투쟁의 지도자들은 카톨릭에 근본적으로 뒤흔들릴 만한 타격을 가했던 것이다.
 
   11. 1560년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칼빈이 처음으로 장로교회를 조직한지 19년만에 칼빈의 제자 존.녹스는 스코틀랜드에서 최초의 장로교회가 스코틀랜드의 국교가 되었던 것이다.
 

   12. 종교개혁에 요구되는 이 모든 어려운 사정이 벌어지고 있었을 때 그 개혁자들에게 끊임없이 귀중한 원조를 제공하여 준 것은 아나- 밥티스트(재 침례교도)였다. 설령 그들이 어떠한 이름으로 불리 우고 있었을 망정  이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험악한 운명에서 벗어나 그들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어떠한 길을 찾아 그들의 피난 터에서 나와 개혁자들과 함께 용감히 싸웠다. 그러나 그들은 무서운 실망의 길을 걷는 운명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제 그들은 자신들을 핍박하는 두 적을 대하게 된 것이다. 루터교회나 장로교회, 그들은 다 모교회(母敎會)인 카톨릭에서 많은 악습을 그냥 계승하게 되었는데 그 중 하나는 국가교회라는 관념이었다. 이 두 교파는 곧 국교가 되었고 그들은 다 모교회(母敎會)보다는 조금 못하였다  할지라도 곧 핍박을 일삼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오랜 동안을 시달려 온 침례교도들의 운명은 슬프고도 두려운 것이었다. 이제 세상은 그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지 않았고 네 사람의 잔악한 박해자들은 민망스럽게도 아나 - 밥티스트(재 침례교도)의 뒤를 쫓고 있었다. 실로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은 피 흘린 발자취 뿐이었다.

 

   13. 같은 때에 사실은 장로교도들보다 몇 년 앞서 대륙에서가 아니라 영국에서 또 하나의 교파가 일어났다. 이것은 종교개혁의 형식으로 일어났다기보다는 그것이 종교개혁을 도운 것은 확실하지만 카톨릭으로부터 실제적인 분리 또는 분열의 형식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이는 마치 869년에 동방 카톨릭이 서부로부터 분리하였고 그때부터 역사상에서 희랍정교회와 로마 카톨릭이라는 명칭으로 알려지게 된 그러한 분리와 비슷한 것이었다. 이 새로운 분리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사정에서 오게 되었다.  즉 영국왕 헨리 8세는 스페인의 캐더린과 결혼하였으나 얼마 후 불안한 그의 마음은 앤 볼레인을 사랑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캐더린과 이혼하고 앤과 결혼하기를 원했지만 이혼이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에 이혼은  교황만이 그것을 허가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경우는 특별한 이유였으므로 교황은 그 허가를 거절하였다. 헨리는 대단한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왕은 이러한 일에 있어서는 자기 자신의 의사대로 처리할 권리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의 수상( 그 당시에는 토마스 크롬웰이었다)은 왕에게 조언하기를 어찌하여 왕께서는 이러한 일에 교황의 권리에 복종하려 하시나이까 하였다. 헨리는 그의 조언에 따라 교황의 권세를 없이하고 자기 자신의 영국교회의 주인이 되었으니 여기에 새로운 영국교회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는 1534년 내지 1535년에 이루어진 일이다. 그러므로 그 당시의 영국교회는 교리에는 아무런 변동이 없었으며 다만 교황의 권세만을 폐기하였던 것이다. 헨리 역시 그의 마음 속에 자기 자신의 개신교인이 되었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으며 카톨릭의 신앙을 가지고 죽었다.
 
   14. 그러나 이 분리는 결국 어떤 깊은 변화 또는 개혁을 가져오는 결과가 되었다. 내부에서 또는 교화의 권세 아래서 종교개혁이 단행되었던 때에는 루터나 그 외 다른 사람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불가능하였으나 일단 분리한 후에는 이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크랜머, 라티머ㅡ 리들레이와 그밖에 여러 사람들이 다소의 중요한 변화를 일으켰다. 그러나 그 후 몇해가지나 이러한 사람들은 메리(피의 메리) 곧 이혼당한캐더린의 딸이  영국의 왕위에 올라 새로운 교회를 다시 권세 아래 넣으려 하였을 때 그러한 변동의 대가로써 피를 흘리게 되었다.  이 무섭고 참혹한 변혁은 메리의 피로 물든 통치 5년으로써 종말을 고하였으나 이 동안에 많은 사람들의 머리가 메리의 피 묻은 도끼 아래 잘라져 갔으며 메리 자신의 머리도 그들과 함께 잘라지고 말았다.그러므로 앤 볼레인(그녀 때문에 캐더린은 이혼당하였다.)의 딸 엘리자베스가 여왕이 되었을 때 영국교회는 다시 교황의 권세를 던져 버리고 재건되었던 것이다.
 
   15. 이리하여 16세기 말까지는 다섯 개의 기성(국가)교회가 있게 되었다.  - 세속 정부에 의하여 유지된 교회 - 이는 곧 로마 카톨릭과 희랍정교회의 둘과 영국교회와 루터교회 곡 독일교회, 그리고 오늘 날 장로교회라 알려져 있는 스코틀랜드 교회들이 그것이다. 그들은 아나 밥티스트라 불리었던 사람들과 왈덴시스 그리고 독립적인 여러 교회들 곧 어떠한 점에서나 카톨릭과 아무런 관계를 맺고 있지 않았던 교회들의 성도들을 모두 다 심히 미워하였고 핍박하였던 것이다. 종교개혁을 위하여 싸우고 있었을 때 베풀어 주었던 것이다. 종교개혁을 위하여 싸우고 있었을 때에 베풀어 주었던 그들의 큰 원조는 벌써 잊어 버렸으며  또한 전혀 무시하여 버렸던 것이다. 그칠 줄을 모르던 핍박 속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종교개혁으로 인하여 각성되고 고취되었던 그 위대한 소망은 피로 물든 망상이었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생존자들은 험준한 알프스 산속에서 그 불편한 피난처를 찾았었고 다른 사람들은 온 세상에서 그들의 은신처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16. 카톨릭에서 분리하였거나 또는 거기에서 나온 이 새로운 조직체들은 그 카톨릭이 가지고 있었던 가장 해로운 과오를 많이 가지고 있었는데 그 몇 가지를 들어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교직자 교회의 제도(외형적으로는 조금씩 다름)
국가교회 (교회와 국가의 결탁)
유아세례
적수례 또는 관수례(머리에 물 뿌림 세례 : 역주)로 침수례를 대신함
침례에 의한 중생(만약 많은 역사가들의 말이 믿을 만한 것이라면 적어도 약간)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핍박(최소한 몇 세기 동안)
 
   17. 초기에는 이러한 모든 국가교회들이 다른 교회를 박해 하였지만 1555년 아우스그버그에서 개최되었던 종교회의에서 서로 다른 교파의 사람들을 핍박하지 않겠다는 것에 동의하는 소위 아우그스버그의 평화라 알려진 일종의 평화조약이 이루어졌는데 이는 한편에 카톨릭교가 또 다른 한편에는 루터 교회가 조인하였다. 즉 우리에게 상관치 말라! 우리도 너희를 간섭치 않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카톨릭인이 루터교인들과 싸운다는 것은 곡 독일과 전쟁을 한다는 것을 의미하였고 루터 교인들이 카톨릭인들과 싸우며 그들을 박해한다는 것은 곧 카톨릭교가 우세가 모든 나라들과 전쟁을 한다는 것을 의미하였기 때문이다.
 
   18. 그러나 박해는 그치지 않았다. 미움을 받았던 아나-밥디스트들은 (지금은 밥티스트라 불리운다) 그 이전의 모든 박해와 또한 오천만명이라는 사람들이 이미 순교자로서의 죽음을 당하였다는 이 무서운 사실에도 불구하고 여지껏 생존해 있었다. 외길로 되어 있는 유럽의 한 도로 가에 30마일의 거리에 이 도로를 따라 두 서너 자의 간격으로 화형의 말뚝이 하나씩 꽂혀 있었고 그 뾰족한 말뚝 끝마다 순교당한 재 침례교도들의 피 묻은 머리가 달렸던 것도 바로 이 시대에 일어난 일이었다. 인간의 상상으로써 이렇게 무서운 광경을 그려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겠는가! 더욱이 믿을 만한 역사에 의하면 이러한 일을 행한 것은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된 제자라 자칭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19. 카톨릭은 성경을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법칙과 지침서로 존중시 아니하였다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그들은 사실 성경을 오류가 없는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바로 이와 똑같은 절대적인 두 가지 다른 것이 또 있는데 이는 곧 신부들의 저서와 교회(카톨릭)의 법령 곧 절대무오한 교황의 교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카톨릭(천주교)와 개신교 카톨릭(천주교)과 침례교회 사이에는 끝까지 합의될 만한 근거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결국 만족할 만한 논의는 도저히 불가능하였던 것이다.
 
   20. 그러면 침례에 관한 문제 그리고 침례의 실시와 방법에 있어서 그 최종적인 권위에 대하여 예를 들어 보기로 하자.
성경은 의심할 것 없이 침례를 가르치고 있으며 또한 그 유일한 방법으로서 침수례를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말하면서도 이와 동시에 그들은 그들의 완전 무결한 교회가 그 방법을 침수례에서 적수례(물뿌림 세례)로 변경시킬 수 있는 완전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주장하며 동시에 절대 무오한 교황의 권위 외에는 다른 아무도 그러한 권리와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21. 여러분께서는 물론 이러한 사실을 알고 놀라시겠지만 나는 이 강의에서 극히 조금밖에 인용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나는 단 여섯 시간의 강의에서 2000년에 이르는 교회사의 중요한 골자를 여러 사람에게 보여주려 하는 이 어려운 일에 정성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22. 바로 여기서 이 무서운 세월 동안에 성경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관하여 주의를 환기시켜 놓는 것이 좋을 듯하다. 기억하여 두셔야 할 일은 그 당시에는 성경이 인쇄되어 있지 않았으며 설령 인쇄술이 발명되어 있었다 할지라도 인쇄할 만한 종이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사실 그 당시에는 성서를 기록할 만한 종이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양피지 또는 염소나 양의 가죽 그리고 파피루스(어떤 종류의 나무 제지 원료)라는 것이 글자를 쓰는데 사용되었던 재료였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들이 사용하고 있는 것과 같은 펜이 아니라 일종의 철필 같은 것으로써 손으로 쓰여진 것인데 성경과 같은 큰 서적은 아마 한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운반해 다닐 수 없었다. 따라서 당시 온 세상에 성경 전권이 구비되어 있었던 것은 30부 이상이 되지 못하였으며 대체로 마태,누가,마가, 요한복음이나 사도행전 또는 서신 중의 몇 권 그리고 요한 계시록이나 구약 중의 어떤 것, 이렇게 몇 권씩 여러 부분으로 되어 있었던 성경이 있었을 따름이다. 전 세계 역사상에서 가장 뚜렷한 기적의 하나는 - 나의 생각으로는 - 하나님의 백성들이 복음의 중요한 요점에 대하여 각각 생각하며 믿고 있었던 것이다 같이 비슷하였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는 하나님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다. 오늘날 우리들이 각각 자기 모국어로 되어 있는 성경 전서의 완전한 사본을 누구나 다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가장 영광스러운 사실이다.
 
   23. 성경에 관한 또 하나의 결정적인 사실에 대하여 심각하게 특별히 고찰하여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것은
AD 1229년에 개최되었던 타울로스 종교회의에서 카톨릭이 취하였던 행동인데 이때 그들은 그 교인의 거대한 무리 곧 일반 평신도들은 성경, 즉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 못하도록 결정하였던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다만 그들이 그 종교회의 석상에서 논의하였던 것을 그대로 말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런데 최근 어떤 카톨릭(천주교)인이 내게 조용히 말하기를 우리가 그렇게 한 목적은 그들이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위하여 어떤 책을 기록하게 하시고 그 백성들이 그것을 읽는 것을 원치 아니하신다는 것은 여간 우스운 일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이 책에 의하면 사람들은 이 책의 가르침에 따라서 심판 날에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 책에 선포되어 있는 것을 기이하게 여기지 말라.

성경에는 "오직 이것들을 기록함은 너희로 하여금 예수님께서 하나님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믿고 그분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한복음 20:31]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에 대한 무서운 책임은 카톨릭(천주교)인들이 감당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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