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교회역사에 관하여

제1강 : A.D 30~500

무형11 2009. 8. 31. 13:18

 

제 1 강(講) :  A.D 30~500

 
 
 1. 약간 기이하기는 하겠지만 광야에서 나온 선지자 침례인 요한의 놀라운 선포와 영도아래 그리스도 자신의 감동적인 사랑과 기적을 행하시는 권능아래 그리고 열 두 사도들과 바로 이어진 계승자들의 훌륭한 선교하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시초의 500년간은 힘차게 전파되었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무서운 피의 발자취를 남기고 있는 것이다. 유대교와 이교주의는 하나하나의 발전을 방해하고 있었다. 침례인 요한은 그 위대한 지도자들 주에서 그 자신의 목숨을 바친 첫 번째 사람이었다.  즉 그는 참수형을 당하였던 것이다. 그후 얼마 되지 않아서 교회의 창시자인 구세주 그 자신이 돌아가셨다. 그는 십자가에 달리어 비참한 죽음을 당하였던 것이다.
 
2. 구세주의 뒤를 따라 지체없이 많은 순교의 영웅들이 쓰러져 갔다.스테반은 돌에 맞아 죽었고 마태는 에디오피아에서 살해되었으며 마가는 죽기까지 거리에 끌려 다녔으며 누가는 목이 매여 죽었고 베드로와 시몬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던 것이다. 그리고 안드레는 십자가에 달리었고 야곱은 목베임을 당하였으며 빌립은 십자가에서 맞아 죽었고 바돌로매는 산채로 가죽을 벗기웠으며 도마는 창에 찔려 죽었고 동생 야곱은 회당에서 내던지어 주기까지 매를 맞았으며 유다는 화살에, 맛디아는 돌에 맞아 죽었고 바울은 목베어 죽임을 당하였다.
 
3. 이러한 모든 일이 일어나기까지는 백년 이상의 세월이 지나갔다. 유대교와 이교주의의 이 가혹한 박해는 두 세기 이상이나 계속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복음은 힘차게 전파되고 있었다. 복음은 로마 제국을 비롯하여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영국, 웨일즈 및 어느 곳을 막론하고 소위 문명이라는 것이 존재하였던 모든 곳에 침투해 가고 있었다. 교회는 크게 발전하였고 제자들의 수효도 계속 증가되어 갔다. 그러나 어떤 교회는 계속 과오를 범하고 있었던 것이다.
 
4. 신약성서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첫 번째의 변경은 그 운영과 교리의 양면이 다 포함되어 있었다. 초기의 2세기 동안에 개체 교회들은 급속도로 번성하였고, 초대 교회 즉 예루살렘, 안티옥, 에베소, 고린도 등의 교회는 대단히 컷으며 예루살렘 교회를 예로 들어 본다면 그 회원은  수 천명(행2:41, 4:4, 5:14) 아마 25000에서 50000명의 회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사도행전과 목회서신을 깊이 바로 잡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베드로와 바울이 미래에 대하여 예언한 것을 보라. (벧후2:12, 행20:29~31, 계2:3을 보라) 이러한 큰 교회에는 필연적으로 많은 설교자나 장로(목자)들이 있었다.(행20:17)그런데 그중 어떠한 감독 즉 목자들은 신약성경에서는 그들에게 부여하지 않은 권한을 주장하기 시작하였고 그들은 여러 장로들과 함께 하나님의 기업 위에 군림하기 시작하였다.(요한삼서 9)바로 여기에 여러 가지 중대하고도 해로운 과오의 삭이 트였던 것이다. 바로 여기에 결국 카톨릭은 물론 다른 교파들이 오늘 날 실행하고 있는 선교상의 잘못된 방법의 시작이 있었으며 초대 교회의 민주적인 근본정책과 운영제도에서 전혀 상이한 결과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불법은 벌써 제 2세기 말 이전부터 조금씩 시작되고 있었는데 아마도 이것이 신약 성경적인 교회제도에서 최초로 변경된 중요한 일이었던 것이다.
 
5. 또 하나의 결정적인 변경은 역사상으로 제 2세기가 끝나기 전에 시작되었으리라고 생각되는 교리 그 자체에 관한 것이었다. 유대 사람들은 이교도들과 마찬가지로 오랜 세대에 걸쳐 의식을 강조하는 교육을 받아 왔었다. 그들은 예표를 원형으로 , 그림자를 실체로  또 의식을 실체로 구원받는 방도로 여겨 왔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성경에는 침례에 대한 것이 많이 언급되어 있는데 침례에 관한 의식과 개인의 구원과 관련이 있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침례에 의한 중생의 관념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이다.(Shackelford pages57;Camp p.47; Ben Benedict, p.286; Mosheim, Vol.1.p.134; Christian p.28)
 
6. 다음에 숨어들기 시작한 중요한 과오 즉 침례에 의한 중생이라는 관념에서 나오는 필연적인 결과라 말할 수 있는데 어떤 역사가에 의하면(전부는 아니지만)바로 이와 동일한 시대에 시작되었으리라 생각되는 것으로서 침례의 대상이 변화되었다는 것이다. 어떤 잘못된 교회에서 침례를 하나의 구원받는 방도와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침례를 일찍이 맡을수록 더욱 좋다는 것에 이르렀으므로 여기에 유아세례가 생기게 되었던 것이다. 그 이전에는 믿는 자만이 침례를 받을 대상이 되어 왔었다. 관수례와 적수례에 관한 ㅓㄳ은 여기에서 언급하려 하지 않는다. 이러한 것을 훨씬 후에 일어난 일이며 수세기 동안은 유아들도 일반 사람과 같이 침수레를 받아 왔었다. 희랍 정교회(카톨릭의 큰 지파)는 금일에 이르기 까지 침례의 근본 형식을 변경하지 않고 있다. 그들은 유아 세례를 실시하고 있으나 침수례에 이외의 다른 방법으로는 하지 않고 있다. (주:어떤 교회 역사가는 유아 세례의 시작을 이 세기에 두지만 나는 로빈슨의 교회에 관한 제 연구에서 짧은 구절을 인용하려 한다.)
"처음 3세기동안 동방에 있었던 모든 교회는 각각 독립된 지체로써 존속하여 왔으며 정부의 원조도 받지 않았다. 그 결과로써 각 교회에는 어떤 세속적인 권력이 없었던 것이다. 이 당시에는 다 교회에서 침례를 받았던 것이다. 제롬(주후 370년)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처음 4세기의 사람들은 다 그리이스와 시리아 그리고 아프리카의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은 성장된 사람의 침례에 대해서 많은 역사적인 기록을 남기고 있으며 370년까지는 유아 침례에 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Shackelford's Compendiam of Baptist History, p.43; Vedder, p.51;Christian, p.31; Orchard, p.50, etc)
 
7. 여기에 기록한 이러한 변화는 하루 동안이나 일 년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서서히 되어진 것이며 또한 전체의 교회에서 일어났던 것도 아니다. 어떠한 교회는 그것을 강력히 거부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AD 251년에 이 충성된 교회들은 이렇게 과오를 받아 들이고 또한 실시하고 있었던 모든 교회와는 성도의 교제를 받아 들이고 또한 실시하고 있었던 모든 교회와는 성도의 교제를 끊어 버린다는 선언을 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교회사상 최초로 공식적인 분리가 일어나게 되었다.
 
8. 이러므로 최초의 3세기 동안에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가르침에서 세 가지의 중요하고도 결정적인 변화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지적될 것이다. 그리하여 의미심장한 하나의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니 그 개요의 요지에 주의하시기 바란다.
① 감독과 교회 운영 방법이 신약성서의 가르침에서 변경된 것. 이 변화는 급속도로 발전하였고 더유ㅜㄱ 강조되었으나 완전히 해로운 것이 되고 말았다.
② 구원에 관한 신약성서의 가르침이 "침례에 의한 중생(거듭남)"으로 변경된 것.
③ 믿는 자들이 받는 침례에서 유아 침례로 변경된 것.(이미 마지막 변화는 다음 세기가 되기까지는 일반적인 것이 아니었고 자주 행하여진 것도 아니었다.)
 
9. 침례에 의한 구원과 유아 세례. 이 두 가지 과오는 정설이 되어 있는 역사의 전하는 바에 의하면 수 세기를 지남에 따라 다른 모든 과오를 한데 뭉친 것보다는 그리고 최근의 세계 대전을 제외하고는 핍박에  관계없는 모든 전쟁보다도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피를 흘리게 한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주로 이 두 가지 과오를 거부하였다는 이유로 암흑시대-12 또는 13세기 동안의 기간만 하더라도 50,000,000명 이상의 그리스도인들이 순교자로서 죽었던 것이다.
 
10. 다음 3가지의 의미 깊은 사실들이 이 3세기 기간 중에 많은 교회 가운데 나타나 있음이 역사적으로 밝혀져 있다.
① 모든 교회들의 분리와 독립
② 감독 곧 목자(pastor)의 종속적 성격(즉, 한 교회의 종일뿐)
③ 믿는 자만의 침례
나는 여기에 루터파의 가장 위대한 역사가 모세임의 저서에서 인용하기로 한다.

제1편 p.71과 72  ▶ 이 황금 시대의 교회 감독이 다음 세기의 감독들과 일치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전혀 다른 그 성격을 혼돈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기와 다음 세기에 있어서의 감독은 일반적으로 개인의 집에 있었으리라 생각되어지는 단독 교회를 맡아보고 있었으므로 그는 교회의 주인이 아니라 실제로는 교회의 봉사자 또는 종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초창기의 모든 교회들은 다 독립된 단체였으며 그중 하나도 다른 교회의 관할 밑에 종속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사도 자신들이 세운 교회가 때때로 의문이 있을 때에는 상의하는 일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들은 재판권이나 지배권 꼬는 입법권을 행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하여 모든 그리스도 교회는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모든 점에 있어서 평등한 입장을 존중하고 있었다는 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11. 2세기에 이르기까지는 많은 환란과 무서운 핍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들은 놀랄 만한 발전을 하고 있었다. 대 로마제국의 전 영토를 훨씬 넘어서 당시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즉 전세계라고는 할 수 없지마는 거의 모든 지역에 복음이 전파되었던 것이다. 어떤 교회 역사가들에 의하면 사도들이 조직한 많은 친교회는 여전히 서 있었으며 사도들의 가르침에 충실하였던 것이라 한다. 그러나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아주 뚜렷하고 현저하게 나타난 과오가 여러 교회 안에 숨어 들어 영원히 사라지지 않게 되었으며 마침내 어떤 교회들은 대단히 무질서하게 되어 버렸다.
 
12. 박해는 더욱더 심하여 갔다. 제 4세기 초기에 정부로부터 아마 최초의 박해령이 발표되었다.교회들의 이 놀라운 발전은 로마에 있었던 이교도 지도자들의 마음을 흔들리게 했으므로 갈렐리우스 황제는 더욱더 가혹한 박해의 명령을 내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AD 303년 2월 24일에 일어나 일이다. 이때까지 이교도들은 어떤 일정한 법령없이 박해를 가해 왔었던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13. 그러나 이 칙령은 복음의 성장을 저지 시키려는  그 목적에서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같은 황제 갈렐리우스는 그 후 꼭 8년만에 (AD 311년) 첫 번째 칙령을 철회하고 실제로 신앙의 자유를 용납하는 다른 하나의 법령을 발표했던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것을 허용하는 법령이었다. 아마 이것이 교회들에게 유리한 최초의 법령이었을 것이다.
 
14. A.D 313년이 시작됨에 다라 교회들은 이교주의에 대하여 압도적인 승리를 얻었다. 새 황제가 로마제국의 왕위에 올랐다. 그는 박해에도 불구하고 성장을 계속하는 이 교회들에게는 반드시 어떤 신비적인 힘이 있음에 틀림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역사에 의하면 이 훌륭하고도 현실적인 관찰력을 가지고 있었던 이 새 황제야말로 다른 사람이 아니라 콘스탄틴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는 창공에 있는 불과 같은 발간 십자가를 보았고 그 십자가 위에 발간 문자로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이로써 네가 정복하라" 그는 이 말씀을 그 자신이 해석하기를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고 또한 사교(邪敎)를 버리고 복음의 이 신령한 권능을 로마 제국의 세속적인 권력 위에 첨부시킨다면 세계를 쉽사리 정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해석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그리스도교는 실상인즉 세계의 종교가 되었고 로마 제국은 전 세계의 제국이 되었던 것이다.
 
15. 그리하여 콘스탄틴 황제의 지도 아래 휴전과 구애(求愛) 와 구혼(求婚)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로마 제국이 그 황제를 통하여 교회와의 결혼을 모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그대의 신령한 권능을 우리에게 부여하라. 그러면 우리는 지상의 일시적인 권력을 그대에게 주리라 하는 것이었다.
 
16. 이 부정(不淨)한 결혼을 완성시켜서 이를 실현하기 위하여 교회회의(혹은 종교회의)가 소집되었던 것이다. A.D313년 그리스도의 교회들과 그 대표자들을 회합시키기 위한 소집 통고가 발표되었다. 전부라고는 할 수 없으나 많은 대표자들이 참석하여 동맹(同盟)을 체결하였다. 이리하여 교권제도(敎權制度)가 형성되었다. 이 교권제도가 조직됨에 따라(-다만 일시적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에서 추방되었고 콘스탄틴 황제가 교회의 머리로 들어오게 되었던 것이다.
 
17. 이 교권제도는 마침내 오늘날 알려져 있는 카톨릭 또는 우주적 교회로 발전될 하나의 뚜렷한 시작이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카톨릭이 시작된 것은 일부 감독 및 목자들이 성서에 있지 않은 교회정책 운영에 관한 새로운 관념이 현실화되기 시작하였던 2세기 말이나 3세기 초엽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8.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콘스탄틴 황제가 그 교회 회의를 소집하였을 때 거기에 응하기를 거부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침례교도)과 교회들이 있었다는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국가와의 혼인관계를 원치 않았으며 중앙집권적인 교회 정치나 또는 개개의 교회 이외에 어떤 종류의 계급적인 교회 이상의 정치도 원치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침례교도)과 교회들은 그 당시 뿐만 아니라 그 후에도 카톨릭의 교권제도 속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다.
 
19. 이 교권제도가 창설되었을 때에 그 통솔자가 되었던 콘스탄틴은 그 자신은 당시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겠다는 것에는 동의하고 있었지마는 그와 함께 이 조직체 안에 들어온 그릇되고 무질서한 교회들이 침례에 의한 중생이라는 이 과오를 채택함에 따라 다음과 같은 심각한 의문이 콘스탄틴의 머리 속에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즉 만약 내가 침례로 말미암아 내 죄를 씻고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 침례로 말미암아 내 죄를 씻고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 침례를 받은 후에 범하게 될지도 모르는 내 죄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는 후세의 모든 사람들을 당황케 하는 질문을 제기하였던 것이다. 침례는 아직 범하지 않은 죄까지라도 씻어 버릴 수 있는 것인가? 또는 침례 받기 전에 범한 죄를 한 가지 방법(즉 침례)으로써 씻어 버릴 수 있으면 침례받은 후에 범한 죄도 다른 또 하나의 방법으로써 씻어 버릴 수 있을 것인가?
 
20. 이와같이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의문을 원만히 해결할 수 없었으므로 콘스탄틴은 결국 교회들과 연합하기로 결심은 하였으나 침례만은 자기가 범한 모든 죄를 한꺼번에 시어 버릴 수 없다고 생각해서 죽기 직전에 받기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죽기 직전까지 침례를 받지 않았던 것이다.
 
21. 전 로마 제국을 위하여 이방종교를 추방하고 자기 나름대로의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받아들인 콘스탄틴의 이러한 행동은 오마 원로원의 원망을 사게 되었다. 그들은 그의 방침을 저지시키려 하였으며 반대를 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그들의 반대는 마침내 황제의 보좌를 로마에서 비잔틴 고대의 도시이며 후에는 콘스탄틴에 의하여 콘스탄티노플이라 개칭하게 된 도시로 옮기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래서 로마 제국에는 두 개의 수도 곧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이 새긱게 되었고, 서로 대항하는 이 두 도시는 수 세기 후에는 분열된 카톨릭, 로마 카톨릭과 희랍 정교회를 다스리는 중심지가 되었던 것이다.
 
22. 교권제도가 형성되어 교회와 국가가 서로 결합하기 이전에 있었던 교회에 대한 박해는 유대종교와 이교주의에 의하여 행하여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중요한 변화가 생기게 되었으니 곧 이름만의 그리스도인들이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콘스탄틴은 그리스도인들이 국가 종교라는 그의 새로운 이념에 협조하여 주기를 열망하고 있어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가르침에서 멀어져 가는 이 중대한 분리에 대하여 많은 양심적인 사람들의 반대가 있었으므로 그는 이러한 사람들을 복종시키기 위하여 정부의 강권을 발동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가르쳤던 근본 진리에 충실하였다.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가혹하고도 참담한 핍박의 세대와 세기가 시작되게 되었던 것이다.
 
23. 지금 우리는 주후 300년에서 500년 사이에 일어난 사건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란다. 콘스탄틴의 영도하에 조직된 교권제도는 소위 오늘날 천주교라고 알려져 있는 것으로 급속도로 발전되어 왔었다. 새로 발족된 이 교회는 세속적인 정부와 결합하여 이미 신약성경에 완성되어 있는 명령을 수행하기 위한 실행기관이 아니라 말씀을 수정 또는 삭제하며 신약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새로운 율법을 제정하는 입법기관이 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24. 이 입법부가 제정한 최초의 법령 그리고 결과적으로 가장 파괴적인 것의 하나는 유아세례를 법으로써 제정한 것 바로 그것이었다. 이 새로운 법률로  말미암아 유아세례는 의무적인 것으로 되어 버렸다. 이는 A.D416년에 되어진 사실이다. 아마 유아들은 이에 앞서 한 세기 동안이나 세례를 받아 왔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새로운 법률이 발효됨에 따라 신약성경에 있는  두 가지의 중요한 가르침이 폐기되었으니 이는 믿는 자의 침례와 자유의사에 의하여 침례를 개인적으로 받으려는 순종이 그것이다.
 
25. 이 새로운 교리와 법률의 필연적인 결과로써 이러한 잘못된 교회들은 곧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로써 가득차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 그리 오래지 않아서 회원의 대부분이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로써 이루어지게 되었으므로 신령한 하나님의 위대한 영적 사업이 거듭나지 아니한 세속적인 권세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말았던 것이다.
 
26. 물론 충실한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은 이 새로운 법을 거부하였다. 『믿는 자의 침례』물론 신약성경적인 침례만이 그들에게 있어서는 유일한 법이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아이들이 세례받는 것을 거절하였을 뿐 아니라 비성경적으로 조직된 교회에서 침례받는 것까지도 거부하였던 교회의 회원이 성경적인 교회의 회원이 되려고 할 때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체험과 재침례가 요구되었던 것이다.
 
27. 물론 충성된 교회들의 그 정책은 곧 국가 교회 주의자를 전부는 아니라 할지라도 순결한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던 많은 사람들의 심한 원망을 사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christian)이라는 이 칭호는 그때부터 이 새로운 과로를 받아드리기를 거절하였던 충성된 성도들에게는 쓰이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 이름을 빼앗기고 많은 다른 이름으로 즉 때로는 어떤 사람에 의하여 때로는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써 불리우게 되었던 것이다. 몬타니스트, 터툴리안, 노베이셔니스트, 페이터린 등등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유아 때에 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다시 베푼다는 이유로 아나 밥티스트(재침례파)라 불렀던 것이다.
 
28. A.D 426년 곧 유아세례가 법령으로 제공된지 꼭 10년만에 암흑시대라 불리우는 무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얼마나 무섭고 캄캄하며 피 비린내 나는 시기였는지!!! 이때부터 10세기 이상이나 걸쳐서 충성된 그리스도인들의 발자취는 대부분 그들 자신이 흘린 피 속에서 물들게 되는 것이다. 도표에 나타나 있는 박해받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다른 이름에 유의하시기 바란다. 때때로 이러한 명칭은 어떤 특수한 지도자들에 의하여 때로는 다른 여러 가지 이유로 붙여진 것이다. 그러나 같은 사람들에게 붙여진 명칭이라 할지라도 때때로 시대가 다르고 국가가 달라짐에 따라 그 명칭이 변하여 갔던 것이다.
 
29. 실제로 교황제도가 뚜렷하게 시작된 것은 암흑시대의 초기였으며 이는 A.D 440년에서 461년에 있었던 레오2세로 인하여 시작되었다. 그러나 교황이라는 칭호가 사용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 아니다. 천주교 역사와 비슷한 이 칭호는 크게 발전하였으며 이는 296년에서 304년까지 로마에 있었던 감독에게 처음으로 적용되었다. 그리고 384년에서 398년에 이르기까지 로마의 감독으로 있었던 시리시우스가 공식적으로 이를 채용하였고 그 다음에 레오2섹가 (440~461) 정식으로 이를 사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707년부터는 보편적인 것으로 주장되었고 그 다음 수 세기 후에는 그레고리 7세에 의하여 교황에게 독점사용이 선언되었던 것이다.
 
30. 이제 이 처음 5세기 동안에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을 요약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1. 민주주의적인 제도에서 성직자 교회제도로의 점진적인 변화
2. 은혜로 말미암아 얻는 구원에서 침례에 의한 구원으로의 변화.
3. 믿는 자의 침례에서 유아세례로의 변화
4. 교권 제도의 확립. 교회와 국가와의 결혼.
5. 황제의 거소(居所)가 콘스탄티노플로 옮아간 것.
6. 유아세례가 법령으로써 제정되어 의무적으로 된 것.
7. 거짓 그리스도인들이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시작한 것.
8. 426년에 암흑시대가 시작된 것.
9. 복음보다도 검(劍)과 횃불이 구원을 얻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 것.
10. 신앙의 자유라고 볼 만한 모든 것은 시들어 매장되었으며 매장된 그대로 여러 세기를 지나게 된 것.

11. 충성된 신약성경적 교회들은 어떠한 이름으로 불리 우고 있었든지 간에 카톨릭의 새로운 세속적인 권력에 의하여 최후의 곤경에까지 쫓기게 되었다는 것. 온 세상에 흩어진 생존자들은 숲이나 산속 그리고 산 골짜기나 동굴 속에서 그 불안한 피난처를 찾고 있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