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진화론에 관하여

우주에 관한 논리적 가능성들

무형11 2009. 7. 19. 21:03

우주에 관한 논리적 가능성들

 

 

믿음이란 당신의 기분이 아무리 변하더라도 당신의 이성이 일단 받아들였던 바를 굳게 잡는 기술이다. -C.S. 루이스

 

다만 진리와 분별(truth and soberness 이성적 정신) 있는 말을 하고 있나이다.(행 26 : 25) -사도 바울

 

우주에 관한 논리적 가능성들 :

우리가 아는 바 하나님에 관한 내용과 부합되는 한 가지 우주 역사를 믿는데는 충분한 논리적 근거가 있다.

 

여기서 언급하는, "우리가 아는 바 하나님에 관한 내용"이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서 전해 들은 바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자연 계시를 통해 필연적으로 유추해 낼 수 있는 바를 가리킨다. 본서에서는 오늘날 과학자들로 하여금 어떤 초지성적 존재가 세심하게 자연 법칙들을 선택하였고, 우주와 생명의 지속적 존재에 꼭 필요한 매우 정밀한 매개 변수들을 결정하였다고 결론짓게 한 여러 관측들을 열거하여 놓았다.

 

만약 창조주가 우주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우리를 보존하시고 돌봐 주시는 하나님이시라면, 그가 우리를 향한 여러 선택적 가능성들 가운데 보존적이고 세심한 쪽을 선택하시리라고 논리적으로 예측할 수 있다.

 

일단 우주가 제 1원인으로서의 초지성적 존재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우주의 역사에 관하여 일곱 가지 기본적 가능성들을 고찰해볼 수 있다. 우리가 어떤 면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숫자는 더 커질수도 있고 작아질 수도 있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점은 마지막 한 가지 선택을 제외하고 다른 모든 경우는 우리에게 나쁜 소식이 되리라는 사실이다. 오직 한 가지 가능성만이 지혜롭고 우리를 보존하시고 돌보시는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는데, 그 우주가 곧 우리가 현재 관측하는 우주이다.

 

 

우주 역사 1번

하나님이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으셨다. 그는 혼자 영원히 자족하며 사신다.

 

우주 역사 2번

하나님께서 조화롭게 작용하는 법칙들에 의해 유지되는 아름다운 우주를 창조하셨다. 그러나 생명체는 만들기 꺼리셨으며, 기껏해야 풀이나하등 동물들만 만드셨다. 그는 대예술가로서 이를 영원토록 혼자 감상하기 원하시고, 함께 누릴 인간은 만들지 않으셨다.

 

우주 역사 3번

하나님은 이 모든 것 위에 하나님 자신처럼 스스로 생각하고 자유의지적으로 행동하는 인간을 창조하셨다. 선택의 자유(free will)를 얻은 인간은 결국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고, 하나님이 그들의 유익을 위해 마련하신 조화로운 법칙들을 깨뜨렸다. 상황이 심히 악화되자 하나님은 인간을 멸절시키셨다. 곧 실험은 실패로 돌아갔다.

 

우주 역사 4번

하나님께서 그 자신처럼 스스로 생각하는 인간을 창조하시되, 다만 그들의 의지를 통제하사 우주를 어지럽히지 못하게 만드셨다. 하나님과 그의 인간은 이후 행복하게 살았다. 다만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섬김이 사랑이 아닌 강제에서 나왔다는 점만 제외하고 말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주문에 의해 넋이 빠진 사람처럼 섬기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이러한 역사들은 우리의 역사와 분명히 모순된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들이 거짓임을 알고 있다.

 

우주 역사 5번

하나님께서 그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다. 그런데 인간들이 하나님의 조화로운 법칙을 깨뜨림으로써 상황은 매우 언잖아졌다. 하나님은 난장판이 된 세상을 떠나 다른 차원으로 물러가시고 인간의 소위를 내버려 두셨다. 인간은 스스로 지옥을 창조하여 멸절하거나 혹은 어지럽혀진 우주와 함께 영원히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버렸다. 많은 사람들은 이 역사야말로 우리의 우주를 가리킨다고 여긴다. 이는 하나님이 우주의 태엽을 감았다가 풀어 놓으셨다는 사상과 일치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은 전지 전능하시고 우리를 세심히 돌보시는 하나님 개념과 모순된다. 우리가 관측하는 우주를 세심하게 설계하신 하나님께서 스스로 돌보실 수 없는 어떤 일을 시작하신다는 것은 이치에 어긋난다.

 

우주 역사 6번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셨다. 모든 상황이 지금 우리와 똑같은데, 다만 인간이 하나님의 도덕률을 범할 때 그가 저들을 무조건 용서하셨다는 점만 다를 뿐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공의로운 법을 굽히시고 인간이 서로에게 행하는 모든 미움과 폭력을 묵인하셨다. 그는 인종 차별이나 기타 사소한 인간적 불법들을 눈감아 주셨다. 그리고 영원토록, 하나님은 태양과 비를 주시고 탐욕과 전쟁과 그로 인한 모든 고통에 필요한 물질들을 내려 주셨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복음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은 그저 용서해 주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불법에 대해 실제로 아무일도 안 하신다면, 이는 최선의 길이라 할 수 없다. 모든 것을 예견하시고 세심히 돌보시는 하나님이 불법을 수수 방관하실 수는 없다.

 

우주 역사 7번

마침내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복음과 흡사한 역사적 가능성에 도달하였다 우리는 앞에서 언급한 모든 나쁜 소식들을 다 가지고 있다 (예컨대,타락이나 폭력). 다만 차이가 있다면, 인간이 하나님의 조화로운 우주 법칙을 범하였을 때,하나님께서 한 가지 계획을 세우셨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는 인간을 멸절시키지도 않으셨고, 저들의 범죄를 묵과하지도 않으셨다. 그는 인간을 내버려 두지도 않으셨고, 억지로 그의 조화로운 법을 지키도록 강요하지도 않으셨다.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하셨다. 하나님은 범죄한 인간들을 보시고 그들에게 마땅한 형벌 곧 사형을 언도하셨다. 그것은 참으로 나쁜 소식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죄인들을 위해 완전한 사면의 길을 마련하셨다. 그것이 곧 복음이다 제 4권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떻게 사형 언도와 용서를 동시에 행하실 수 있었는지 자세히 알아볼 터이지만, 간단히 말하면 그 자신이 신인(God~man)이 됨으로써 이를 이루셨다. 하나님은 죽으실 수 없으므로, 그는 필멸의 인간이 되셔야 했다. 또 그는 하나님이 되셔야 했다. 왜냐하면 인간은 죽을 때 자기 자신의 죄 값만 치를 수 있기 때문이다. 오직 죄 없는 인간만이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 속할 수 있다.

 

이 모든 과정에서 우리가 할 일은 그의 행하시는 바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이 믿음이다. 우리는 자신의 길이 잘못되었음을 겸손히 인정할 때 믿음을 갖게 된다. 하나님의 길은 옳다. 성경은 이를 "회개"라 부른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은 결국 우리를 변화시키시고 하나님의 조화로운 법 안에서 풍요로운 삶을 살게 하시며 영원토록 그의 친구로 삼으신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그를 사랑하도록 강요치 않으시고 다만 그 선택을 우리의 자유의지에 맡기셨다. 우선 자신의 잘못된 길로 갔다가 좌절을 경험한 후, 우리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길로 돌아을 수도 있고, 아니면 끝까지 고집스럽게 자신의 길로 나아갈 수도 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빛을 받아들인 새로운 타입의 인간에 관해 언급하면서 그들이 "거듭났다" 혹은 "하나님에게서 났다"고 표현한다.

 

"그가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에 의하여 지은 바 되었으나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더라. 그가 자기 백성에게 오셨으나 자기 백성이 그를 영접하지 아니하더라. 그러나 누구든지 그를 영접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즉 그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니라. 그들은 혈로나 육신의 뜻으로나 또한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였고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라."(요 1:10-13).

 

 

논리적 역사 검토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주장하는 모든 메시지 가운데 역사의 기초가 되는한 가지 메시지를 받아들일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다.

 

물론 다른 종교들도 나름대로 역사적 기여도를 갖고 있다. 그러나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복음이다. 복음은 역사적 인물들의 가르침 면에서뿐 아니라그 인물들이 행한 바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역사상 부처가 행한 일을 모른다 할지라도, 당신은 고상한 팔정도를 따라 행할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모른다면, 다시 말해 그의 죽으심과 부활을 제쳐 놓는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되다고 성경은 말한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지 못하셨다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너희의 믿음 또한 헛것이라. 뿐만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거짓 증인들로 밝혀지리니, 이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일으키셨다고 증거하였기 때문이라. 만일 죽은 자들이 정녕 살아나지 아니한다면, 그 분께서 그리스도를 일으키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들이 살아나지 못한다면 그리스도께서도 일으켜지지 못하셨으리라. 만일 그리스도께서 일으켜지지 못하셨다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너희 죄들 가운데 있는 것이라.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사람들도 멸망한 것이라.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오직 이생뿐이라면, 우리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비참한 사람이라.”

(고전 15: 14-19).

 

복음은 두 가지 역사적 사건에 근거를 두고 있다. 첫번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사실인데, 이에 관해서는 이론을 제기하는 자들이 별로 없다. 두번째는 그가 죽음에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이 실제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는가를 생각할 때 믿음이 중요한역할을 하게 되는데, 이는 부활이 비논리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 사건과거기 함축된 의미를 받아들이는 일이 선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만약예수님께서 그 자신의 선포대로 하나님이시라면,그가 죽음에서 부활하시는 것은 그다지 비합리적인 일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죽음에 얽매여 있다는 것이 더 비합리적인 일이 될 것이다. 지금껏 모든 종교 지도자 가운데, 자신이 세상의 구주요 독특한 방식으로 창조주 하나님과 하나 되며 죄를 사하는 권세를 지니고 스스로 죽음에서 부활할 능력이 있다고 선포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의 신적 주장에 대한 증거로서 성경은 그의 부활을 제시하면서, 이는 또한 우리를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는 능력의 증거도 된다고 가르친다(행 26: 23).예수님의 자아인식은 부활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가 다음과 같이선포하신 이유도 그것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요 11: 25상). 역사적 사건 없이는 복음도 있을 수 없다. 다른 모든 종교들 가운데,하나님이 인간사에 직접 관여하신 그러한 사건은 아직 없었다 (역사적,고고학적 증거에 관해서는 제4권을 참조하라). 하나님이 우리 세상에 손길을 미치셨다면, 이는 예수라는 이름의 인간을 통해서만 이루어졌다.

 

 

 

논리적 반대 견해

 

 

반대 1 : "믿음은 논리를 배척한다"

 

반대

성경의 믿음 교리를 잘못 이해한 몇몇 사람들은 복음이 논리에 의해 됫받침되는 게 아니고 무조건 믿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떤 이들은 믿음을 갖기 위해 인간의 모든 논리를 허공에 날려 보낼 수 있어야 영적인사람이라고 가르친다. "어쨌든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 게 아닌가? 우리의 천성 가는 길을 논리적으로 따지는 일은 불가능하지 않은가? 또 성경에서도 복음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믿음의 도약"이나 "맹목적 믿음"과 같은 표현은 분명 논리성을 완전히 배제하고 있다. 불신자들은 성경적 신앙을 평할 때 주로 이러한 표현들을 사용하곤 한다.

 

응답

성경에서 믿음을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한 것은 사실이지만(히 11'1), 이는 결코 믿음이 어떤 이해할 수 없는 불합리한 것들의 증거라는 뜻은 아니다. 과학은 우리가 직접 볼 수 없는 여러 가지 사실에 대해알려 주는데,그렇다고 해서 과학이 비논리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리고 성경에서는 믿음을 보이는 사물과 모순되는 어떤 것의 증거라고 말하는 게 아니며, 또 단순히 우리가 믿고 싶어하는 어떤 것에 대한 확신감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본장의 서두에 언급된 루이스(C.S. ewis)의 믿음에 대한 정의는 핵심을 잘 다루고 있는데, 평안보다 진리를 먼저 구하라는 그의 유명한 강론에서도 이러한 면이 나타난다.

 

전쟁이나 다른 모든 일에서와 마찬가지로, 종교에서도 평안은 단순히 구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진리를 구한다면, 결국 평안도 얻을수 있다. 그러나 평안만을 구한다면, 평안과 진리를 둘 다 얻지 못할 것이다. 은근한 설득과 소망적인 생각만 갖고 시작한다면 결국 실망만 얻게 될 것이다.

 

메시아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시리라는 히브리 예언을 예수님이 어떻게 성취하셨는지 언급하면서,바울은 로마 총독 베스도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 다만 진리와 이성적인(truth and soberness) 있는 말을 하고 있나이다.(행 26:25).그는 고린도 신자들에게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전 14 : 20)고 권면한다. 그는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믿음을 위하여 감각이나 판단의 기준을 낮추라고 요구하지 않고 오히려 이렇게 말한다. "나는 지혜 있는 자들에게 말함과 같이 하노니 너희는 내 이르는 말을 스스로 판단하라"(고전 10 : 15).

베드로는 신자들에게 "건전한 판단력"(벧전 4 : 7, NASB)를 사용하라고 권한다. 누가는 베뢰아인들이 "더 고상하여서 전심으로 말씀을 받아들이고, 이 말씀이 그런가 하여 매일 성경을 상고하므로"(행 17:ll)고 논평한다. 신약 저자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무조건 믿도록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인 사람들에게 확신을 주기 위해 건전하고도 합리적인 논증들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비합리적이거나 맹목적인 믿음의 도약은 성경에서 언급하는 종류가 아니다.

고린도전서 1 : 18에서는 복음의 메시지가 이를 거부하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어리석게 들린다고 말한다. 그러나 몇 구절 뒤에 보면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지혜가 된다고 증거한다. 실제로 그 구절은 성경이 건전한 회의론을 어떻게 처리하는가에 대한 좋은 예가 된다. 진정한회의론이 그렇듯이, 성경은 특정한 철학이나 시대의 소위 변덕스런 "지혜"에 대하여 항상 경계하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말할 때, 이는 믿음이 비논리적이란 뜻이아니다. 우리가 믿음 더하기 선행에 의해 구원받는다고 말할수 없듯이,믿음 더하기 논리에 의해 구원받는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러나 행위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듯이(약 2:26), 생각을 동반하지 않는 믿음은 아무리 완곡하게 말하더라도 무언가 부족하다. 하나님은 그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마음과 목숨을 다할 뿐 아니라 뜻(생각)도 다하기를 바라신다(마 22.37).

 

끝으로, 논리만으로는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 없다는 사실도 명심해야 한다. 자연 계시는 우리를 특별 계시에 이를 수 있는 정도까지만 이끌어 준다. 제 9장에서 언급하였듯이, 우주 안에 드러나 보이는 세심하고 의도적인 설계의 증거는 말씀으로 된 하나님의 특별 교신을 찾아야할 강력한 이유를 제시해 준다. 그렇게 찾는 이들은 성경의 메시지를 이해하고 적용하기 위하여 계속해서 그들의 이성적 힘을 이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이성적 능력의 사용이 우리 삶에서 성령의 역사를 훼방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모든 논리를 던져 버리고 완전히 자제력을 잃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는"(벧 4 7) 태도를 취한다.

 

 

반대 2

 

너무 어리석게 들린다"

 

반대

기독교 복음의 핵심 사상들은 20세기와21세기에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수 없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시고,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해죽는다는 사상들은 전부 죄 개념과 관계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 개념들은 천년 전에는 인간의절박한 문제였을지 몰라도, 지금은 진부한 이야기일 뿐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그런 세련되지 못한 문제에는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만약 기독교가 살아 남으려면, 오늘날 관심사에 맞도록 수정을 가해야 한다

 

응답

복음은 세련된 척하지 않는다. 영생의 길이 지성적으로 뛰어난 사람들만 깨달을 수 있는 어떤 것이 되어야 하겠는가? 영생이 가장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상급이 되어야 하겠는가? 아니면 어린아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쉬운 것이 되어야 하겠는가? 누가복음10 :21에서,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신다. "오 하늘과 땅의 주이신 아버지시여, 이런 일을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들에게는 숨기시고 아기들에게는 나타내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그러하옵니다. 아버지시여, 이는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버지 보시기에 선함이니이다."

만약 무한하신 우주의 창조주께서 보잘것없는 우리 지구인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알리기 원하신다면,우리 중 하나처럼 되는 것보다 더 잘자신을 보이실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만약 그가 우리에게 창조주의 도덕률을 범하는 일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알리기 원하신다면, 우주에서 가장 값지고 고귀한 것, 즉 자신의 생명을 죄의 삯으로 희생시키시는 것보다 더 강력한 시위가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만약 그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리기 원하신다면, 우리를 위해 죽으시는 것보다더 극적으로 이를 보이실 수 있는 것이 있겠는가?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람이 친구들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내어 놓는 것보다 더 위대한 사랑은 없나니"(요 15 13).

변화하는 사회의 도덕 기준에 맞추기 위해 하나님의 메시지를 변화시킨다는 생각이 과연 논리적인가? 누가 누구에게 맞추어야 하는가? 지난 몇 백년 동안 정말 인간의 본성이 변하였는가? 그래서 우리의 변화된 습성이 인간 환경을 개선시켰다고 믿을 만한 근거가 있는가? 우리가 밤에 문 잠그는 일을 멈추었는가? 도시의 범죄율이 줄어들었는가? 심야뉴스의 여러 이야기들은 우리를 희망에 부풀게 하는가? 오늘날 죄 문제는 더 이상 의미가 없는가?

앞서 언급하였듯이, 성경은 변화하는 인간 철학에 대해 건전한 회의론을 제기한다. 고린도전서 1 : 20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지혜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학자가 어디 있느냐? 이 세상의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게 만드신 것이 아니냐?."

복음은 오늘날뿐 아니라 그것이 처음 전파되던 당시에도 사람들의 기호에 맞춰 변화하지 않았다. 복음은 승리에 찬 정치적 메시아를 기대하던 유대인에게는 부담거리가 되었고, 존경받아야 할 구세주가 십자가에 달려 죽을 수는 없다고 믿던 헬라인에게는 어리석게 여겨졌다(고전 1 : 22-23). 그런데 놀랍게도 이러한 거부감들이 복음의 전파를 막지 못하였다. 사도들은 당시 지혜에 걸맞도록 복음을 수정하지 않았다. 바울은 어리석게 들리는 두 마디 말씀 곧 "그리스도가 못박히셨다"는 말로 복음을요약하였다. 그리고 그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메시아를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이라고 불렀다.

이는 메시아가 모든 사람에 의해 잘 받아들여졌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많은 유대인과 이방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편견에도 불구하고복음을 받아들이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반대 3 : "복음은 너무 편협하다"

 

주장

미국과 유럽은 문화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점점 더 다양해지고 있다. 세상에는 여러 신앙을 지닌 사람들이 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배타적 주장을 일삼는 복음을 어떻게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요한복음14:6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을자가 없느니라." 또 사도행전 4 12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한다. "다른이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다른 종교를 좇기로 결심한 사람이나 하나님을 따르되 나름대로 따르며 선하게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어떻게 기쁜 소식이 될 수 있는가?복음은 오늘날 우리 세계에서 볼 때너무 편협하다. 천국에 이르든 열반에 이르든 구원을 얻는 길은 여러 개있지 않은가?

 

응답

그 주장의 마지막에 논리적 결함이 여실히 드러난다. 왜냐하면 동일한사람이 지옥에 가면서 동시에 젖소로 환생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한 선한 사람은 천국에 가는데 그와 동일하게 살았던 다른 사람은 개인적 자아를 모두 잃고 열반에 들어간다는 것도 논리적이지 못하다. 복음은편협하다. 그러나 진리의 본성이 바로 편협성이다. 우리의 논리 법칙에따라 볼 때, 두 개의 모순되는 명제는 동시에 진리가 될 수 없다. 실제로 자연을 관찰해 보면 각 경우에 해당되는 자연 법칙이 단 하나뿐임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사람들이 자기 기호에 따라 여러 종류의중력 법칙 중에서 하나를 골라 잡을 수는 없다. 복음을 접할 기회가 적었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제 3권 끝 부분에서 좀더 언급하기로 한다. 그러나 엄격한 논리적 입장에서 볼 때,하나님께서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한 가지 길을 마련하신다는 생각은 온전히합리적이다. 맹목적 신앙과는 달리, 합리적 신앙은 믿음의 대상을 지녀야한다. 만약 사람들이 오이 피클과 치즈 혹은 자기 맘에 드는 다른 어떤것의 능력을 믿어도 천국에 이를 수 있다면, 하나님과 그의 길에 대한믿음을 행사할 기회가 거의 없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마지막 요점에 이르게 된다.

 

 

 

논리적 적용

복음을 개인적인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좋은 논리적 근거가 있다.

 

과학에서 순수한 논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되어 있다. 모든 과학적발견들이 오직 논리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논리는 우리에게 어떻게 추론해야 할지 가르쳐 주지 않는다. 추리하고 선택하는 주체는인간의 마음이다. 논리는 단지 그룻된 추론을 제거하는 데 도움을 줄 뿐이다. 믿음의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논리는 우리를 믿음의 문턱까지 이끌어 줄 수 있다. 그러나 문지방을 넘느냐 마느냐의 개인적 결정은인간의 영이 하는 것이다.

오늘날 서방 사회에서 종교는 "개인적 문제"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전문적인 표현으로 종교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의무 수행을 의미한다면 나는 거기에 동의하겠다. 위선자들이 하듯이 자신의 선행을 나팔부는 일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논하고자하는 것은 종교 문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의 개인적 관계에 관한문제이다. 만약 "복음을 개인적인 것으로 만든다"는 말이, 복음을 흔자서만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과 공유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사용된다면, 논리적으로 볼 때 복음은 "좋은 소식"이 되지 못할 것이다.

 

내가 "복음을 개인적인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한 말은 복음을 우리에게 기쁜 소식으로 만들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영접해야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교회뿐 아니라 하나님과도 개인적인 관계를 가져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에 관해 이야기할 뿐 아니라 하나님과 이야기할수 있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 양자 물리학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도 언급하였듯이 우리는 "다른 인간의 영혼에 다가갈 때처럼 직접"'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있는 기회의 특권을 누려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으리라고 합리적으로 기대할수 있겠는가?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이 영원한 관계를 갖기 위해 행해져야 하는 모든 일들이 이미 다 행해졌다는 사실을 명백히 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실 때, 그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오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우리 각자가 복음을 영접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할 일이 있는데, 그 단순한 예수님의 두 가지 명령은 "회개하고‥‥‥믿으라"였다. 마가복음 1 : 15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개인적 회개는 논리적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영원한 동반자가 되기에 적합하다는 사실을 어떻게하나님께 보여 드릴 수 있을까?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예수님은 한 가지 비유를 통해 하나님보시기에 의로워지는 두 가지 길이 있음을 설명하시는데, 한 가지는 옳은길이요 또 한 가지는 그릇된 길이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으로 올라갔는데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요, 또 한 사람은 세리더라.

그 바리새인은 서서 혼자 이렇게 기도하더라. '하나님이시여, 나는 다른 사람들, 즉 착취하고 불의하며 간음하는 사람들과 같지 아니하고, 또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일 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내가 얻은 모든 것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라고 하더라. 그런데 그 세리는 멀리 떨어져 서서 차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기를 '하나님이시여, 죄인인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하더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이 저 사람보다도 의롭게 되어 자기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이는 자신을 높이는 자마다 낮아질 것이요, 자신을 낮추는 자는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시니라.(눅 18: 10-14).

 

첫번째 사람같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우리보다 못하게 여김으로써 자신을 의롭게 만들 수 있다 우리는 자신과 하나님께 우리가 그다지 나쁜 인간이 아니며 선행으로 이를 입증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방법은 우리 자신에게는 우리를 정당화시킬 수 있겠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안 된다.

회개를 위해서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악됨을 인정하고그의 긍흘 없이는 우리 형편이 절망적임을 고백해야 한다 완벽하게 좋았던 우주를 어지럽히는 데 우리가 한몫한 것도 고백해야 한다. 또 회개에는, 예전에 우리가 가던 길 곧 죽음에 이르는 옛길을 버리고 하나님이 애초에 예비하신 생명의 길로 돌아가 그의 인도를 받겠다는 소망이 나타나야 한다.

 

믿음의 첫발을 내딛는 것은 논리적이다

합리적 신앙은 믿음의 대상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의 대상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명백히 지정한다. 그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우리를 대신해 하나님의 공의로운 징벌을 다 담당하셨다. 하나님은 그 외아들의 생명을 우리를 위해 내어 놓으심으로 그의 위대한 사랑과 엄정한 공의를 동시에 보여 주셨다.

그러나 이 십자가 사건은 다만 객관적 교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그것은 병든 자를 건강케 하고 죽어가는 사람을 살림으로써 하나님께서본래 의도하신 풍성한 생명을 누리면서 그와 사귐을 갖게 만드는 하나님의 도구였다.

성경의 믿음은 지적인 동의 이상의 것이다. 이는 우리의 길을 버리고하나님의 길을 택하는 논리적 결단이다. 믿음의 첫발을 내딛기 원하는사람은 하나님께 자신의 도덕적 실패를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자기를 대신해 죽게 하신 하나님께 친히 감사해야 한다. 그 이후로, 우리는 매일 그리스도를 우리 삶의 주인으로 고백하고 따름으로써 믿음을 표현한다.

 

그리스도 안에 뿌리 내리는 것은 논리적이다

우리가 성경을 떠나 신학적 "전문가"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원하시는바가 아니다. 바울은 그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원하는 바를 다음과같이 언급하였다.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그 안에는 지혜와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골 2. 2-3). 또한 그는 골로새 교인들에게 "그(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으라"(7절)고 권면한다.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고 세움을 입으려면 매일 일정 시간동안 기도와 성경 읽기를 통해 주님과 일대일 관계를 맺는 것이 필요하다 쌍방교제가 이루어지지 않는 관계는 비합리적이다. 진정한 믿음은 "화재 보험" 같은 종류의 구원에 만족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참 믿음은 우리 믿음의 주인이자 온전케 하시는 이에 대해 더욱더 큰 호기심을 갖게 하며,우리를 향한 그의 뜻을 더 잘 이해하고 싶어하고, 그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더 크게 표현하고 싶어하며, 그가 우리 삶에 보내 주신 모든 사람들에대해 더 큰 관심을 갖게 한다. 또한 그의 말씀은 우리에게 정기적으로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만나 서로 위로하고 성경을 가르치며 예배하도록 권면한다(히 10:24-25, 행 2:42).

그러나 한 가지 주의할 점은, 교회 중에는 성경 가르치는 일을 중요한 책임으로 여기지 않는 곳도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말이나 전통보다 위에 놓는 신자들의 모임을 찾기 위해 회의적 방법을 통해조사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다

 

결론

 

앞서 제시한 모든 근거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일은 정서적 안녕과 풍성하고 영원한 삶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지극히 합리적인 행위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하나님을 섬길 때 두려움 대신 사랑으로 자유로이 섬길 수 있게 해주는 한 가지 계획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이는 일은 매우 논리적이다. 우리가 예수님께 온전히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영생은 노력으로 얻는 게 아님을 깨닫는다면, 우리의 선행은 하나님 앞에서 점수를 따기 위한 필사적 행위가 아니라 사랑의 행위가 될 수 있다.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저주의 두려움이나 강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감사함으로 자유로이 하나넘을 섬기게해준다. 그리고 모든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해준다.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없다면 우리 자신의 가치를 세우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중요한 내용 및 토의 사항

 

우리가 아는 하나님에 관한 내용과 부합되는 한 가지 우주 역사를 믿는 일은 충분한 논리적 근거를 갖고 있다. 자연 계시를 통해 하나님이 우주의법칙들을 지극히 정밀한 매개 변수와 함께 매우 세심하게 택하사 인간이살 수 있게 하셨음을 알게 된다. 우주를 보존하시며 초지성적이고 세심하신 창조주께서 다른 경우에도 우리에게 우호적인 세심한 선택을 하실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논리적이다. 일곱 가지 우주의 가능성 가운데, 오직 한가지만이 지성적 예견 혹은 배려를 보여 주고 있다.

 

예견 혹은 배려를 보여 주는 한 가지 우주의 가능성은, 하나님께서 만약 애써 지성적 존재를 만드신다면 하나님의 목적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능력이 있는 존재를 만드시리라는 것이다. 혹시 이 존재들이 우주를 난장판으로 만든다면, 하나님은 이 우주의 가능성에 따라 이미 짜 놓은 한 가지계획을 시행하신다. 그는 인간을 멸절시키시거나 그들의 불의를 묵과하지 않으신다. 인간을 내버리시거나 억지로 우주와 조화를 맞추도록 강요하지도 않으신다. 그의 해결책은 인간이 변화할 수 있도록 선택권을 주시는 것이다. 거기에는 공정한 형벌 사형과 온전한 사면, 완전한 공의와 무한한 자비가 포함되어 있다. 인간을 향해 먼저 희생적 사랑을 드러내 보이심으로,사람들에게 사랑의 관계에 들어을 수 있는 최선의 이유를 제공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주장하는 여러 가지 메시지 중에서 역사에 근거하고 있는 한 가지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일은 충분히 논리적이다.

 

단 복음은 단지 한 역사적 인물의 가르침에만 중심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실제로 행하신 일에 중심을 두고 있다. 복음의 핵심은 두 가지 역사적 사건이다.하나는 예수님이 로마의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일인데, 이에 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또 한 가지는 그의 부활이다. 후자를 생각할때는 믿음이 필요한데, 이는 그 사건이 비논리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 사건과 거기 포함된 의미를 받아들이느냐 마느냐가 선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만약 예수님이 그의 주장대로 하나님이시라면, 그가 죽음에서 부활하실능력과 이유를 갖고 계시다 해도 전혀 무리가 없다.

 

만약 하나님이 이 세상에 내려오셨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통해서뿐이었다.다른 어느 종교 지도자도 세상의 구세주라 주장하거나, 특별하게 창조주와하나가 된다거나, 개인적으로 우리 죄를 담당할 권세를 갖고 있다거나, 스스로 죽음에서 살아날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지 못하였다. 그에 관해 쓰여진 방대한 역사적 문헌들을 보거나 그의 이름으로 변화된 수많은 삶과 병원, 자선 기관 등으로 판단해 보건대, 다른 그 어느 인물이나 종교에서도 그처럼 하나님이 함께하신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복음의 핵심 사상들(그 중에서 특히 죄로부터 구원받아야 할 필요성)이 현대에도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 아니면 오늘날 풍습에 맞게 수정되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질문들을 던져 보자. 하나님의 메시지를 변화하는 사회적 도덕 기준에 맞추어 변화시킨다는 것이 논리적인가? 누가 누구에게 맞추어야 하는가? 지난 수백년동안 인간의 본성이 변화하였는가? 심야 뉴스에 나오는 이야기들이 우리를 희망에 넘치게 하는가? 오늘날 죄 문제는 우리와 무관한가?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다는 사상은 어떠한가? 희생의 개념은 어떠한가? 이 개념들은 원시적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우주의 창조주께서 그와 비슷한 우리 인간(현대인이건 고대인이건)에게 자기 뜻을 전하고자 하실 때, 직접 인간이 되시는 것보다 더 확실한 방법이 어디 있겠는가? 그의도덕률을 범하는 게 얼마나 무서운 범죄인지 알리고자 하실 때, 그 징벌로서 우주에서 가장 값진 것을 희생시키는 일보다 더 강력한 교훈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우리에 대한 그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보이고자 하실 때,우리를 위해 죽으시는 것보다 더 극적인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다면 복음은 오늘날 세계에서 볼 때 너무 편협한가? 천국이나 열반에이르는 길은 여러 개 있어야 하는가? 그러한 질문은 논리적으로 문제가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면서 동시에 젖소로 환생하기는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복음은 편협하다. 그러나 편협함은 모든 진리의 특성이다. 합리적 신앙은 반드시 믿음의 대상을 지녀야 한다. 만약 사람들이 서로 모순되는 여러 신앙 체계에서 마음대로 대상을 골라 잡는다면, 하나님과 그의 길에 대한 믿음을 행사할 기회가 없어질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우리보다 못한 자로 여김으로써 스스로 의로워지려는 것은비논리적 행위이다 이러한 방법은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우리를 정당화시킬 수 있겠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안 된다.

 

복음을 개인적으로 만드는 일은 충분히 논리적이다. 성경적 믿음은 지적인동의 그 이상이다. 믿음이란 우리의 길을 버리고 하나님의 길을 택하는 논리적 선택이다. 복음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개인적으로 예수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해야 한다. 단순히 교회와 관계를 갖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하나님과 개인적 관계를 가져야 한다. 우리는 단순히 그에 관해 말하는 관계가 아니라 그에게 말할 수 있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 참회개는 우리의 옛 생활 방식에서 돌이키는 것을 필요로 한다. 참 신앙은 말로만 섬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삶을 그에게 드리는 것을 필요로 한다. 이 일이 힘들어 보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이 일은 어렵다. 이 가운데 어느 하나도 인간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이 사실을 깨달으면, 우리는 예수님께 온전히 의존해야 함을 알게 된다. 우리가 스스로 영생을 얻을수 없음을 깨닫는다면, 우리의 선행은 하나님 앞에서 점수를 얻으려는 필사적인 노력이 아니라 사랑의 행위가 될 수 있다.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강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감사함으로 그를 섬길 수 있게 해준다.

 

 

 

프레드 히어렌